올해 스물 두살, 취업 준비, 대학공부, 연애(?), 다사다난한 청춘의 변곡점에서 한 학생이 대만으로 떠났다. 목적은 여행도 아니요, 관광도 아니다. 그것은 지리적인 목적지가 아니라, 거리를 알 수 없는 내면의 목적지를 향한 여정이었다. 대만 불광사에서 한 달간의 귀한 여정을 마치고 온 장원석(부산대학교 공과대학 건설융합학부 토목공학과) 학생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불佛타는 청춘, 대만에 가다① 들어가기 전에 나는 대만으로 떠났다. 한 달. 대만 불광산사에서 한 달간 템플스테이를 실시한다는 정보를 듣고서 가감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한
남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중 하나이다. 허나 아름다운 천혜의 자연을 품은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몸에서 흙 냄새, 바다 냄새가 빠질 틈이 없는 일상이 남해 사람들의 삶이다. 그럼에도 남해 사람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바쁜 삶의 틈에서 여유와 운치를 찾아내는 능력이 탁월했던 것 같다.개인적으로는 남해에 있는 절들의 사명(寺名)에서 그 운치가 있다고 본다. 화방사(花芳寺)가 그러하고, 망운암(望雲庵), 운대암(雲坮庵)도 그렇다. 억척스러운 삶 속에서도 그들만의 상상력으로 지어낸 사명(寺名)에서 남
청송사보다 더 먼저 뿌리를 내려 이곳을 지키고 있던 소나무. 가지는 굽었지만 가지 끝엔 기개가 넘친다. 지리산의 품에서 산세를 빼닮은 나무는 그렇게 도량을 지키는 호법수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청송사의 역사는 채 50년이 되지 않는다. 한 노부부가 기도하며 살던 터를 스님께 공양 올리며 부처님을 모시게 됐다. 그리하여 창건주이신 형우스님은 터에 요사를 짓고 수행하는 도량으로 삼게 됐고, 지금의 주지 명국스님이 중창하며 지리산하에 안정된 도량을 일구게 됐다. “지리산은 어디에 앉아도 풍경이 좋다 해요. 앞으로 보이는 산세가 정말
옥천사의 제일 암자인 청련암은 1678년 숙종대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여러 번 의 불사를 거쳤는데, 1895년에 수룡, 화용 스님에 의해 중창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리 오랜 역사를 지닌 암자는 아니지만, 옥천사를 중심으로 백련암과 더불어 정진도량으로 자리 잡고 있다. 청련암, 연화산 자락 휴식처로 변모청련암이 크게 변한 것은 근래 들어서다. 청련암 감원이신 승욱큰스님이 주석하시고 난 이후부터 법당 불사를 새로이 하고, 도량 전체를 재정비했다. 인법당이던 큰법당은 여러 방으로 나뉘어져 있던 것을 리모델링해 여법한
얼마 전 만불전에서 자비도량참법기도에 동참했던 이원명성 법우님께 눈인사를 건네자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이신다. 법회를 마치고 보살님과 함께 절 뒤뜰에서 따뜻한 햇볕을 등지고 앉았다. 잠시 염주를 놓고 지난날의 신행 발자취를 회상하는 보살님의 얼굴이 꽤 상기된 표정이다.“젊은 사람이 예쁘지, 늙은이 사진 찍어서 뭣하게. 보기 싫어.”라며 연거푸 인터뷰를 거절하셨지만, 보살님의 가방에 달린 작은 목탁이 귀엽다며 화제를 돌리자 자연스럽게 대화가 풀렸다.“아이고, 이거 큰스님이 직접 달아 주셨어. 이 가방에 달고 다니라고.” 하며 웃으신다.
진감혜소 국사가 절을 세우기 위해 지리산을 찾았다. 화개에 다다랐을 때 나무 기러기 세 마리를 만들어 하늘에 날려보냈다. 기러기 한 마리는 국사암 밑 목압木鴨마을에, 다른 한 마리는 쌍계사 터에, 또 한 마리는 현재의 국사암 터에 내려앉았다. 이후 진감 국사는 국사암을 중창하고 쌍계사를 창건하였다. 국사암은 쌍계사의 부속 암자이기도 하지만, 연대로 치자면 오히려 쌍계사보다 앞선다. 진감 국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암자를 찾는 대중들이 늘어났고 더 넓은 도량이 필요하게 되면서 쌍계사 창건까지 이어졌다는 이야기다.국사암 입구에 들어서면
꺼지지 않는 신심의 불씨백중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법당에는 기도를 올리는 불자들의 모습을 보기 힘들다. 일반 사찰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풍경이 백룡암에서는 귀하디 귀한 작품 이라 한다. 김해 마을에서 도량까지는 급경사와 비탈길이 이어져 신도들조차 법회에 참석하려면 절에서 스님이 내려오시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걸어서 오르내리면 인대가 늘어날 정도라고 하니 그조차 엄두를 내기가 힘들다. 부처님 전에 다다르기까지 지나야 할 길이 여간 험난한 것이 아니다. 주법당과 대웅전 뒤편의 산신각, 요사채가 전부인 소담한 도량은 장마철이면 지
햇살이 따가운 날 육화전 앞 연분홍 연꽃이 하나 둘 셋 차례대로 피고 지고를 한다. 대웅보전, 육화전, 만불전에서는 생전예수재와 백중을 맞아 생사윤회의 괴로움을 면하고, 깨닫고 성장해 나가는 바른 불자가 되기 위해 일심으로 동참한 지장경 100일 독송 기도가 한창이다.마침 활짝 핀 연꽃에 빠져 미소를 머금은 만불약사회 보안인 회장님의 모습이 밝아서 “여기를 보세요. 하나, 둘, 셋!” 셔터를 찰칵찰칵 몇 번을 눌렀다. 수줍게 웃으며 “이쁘게 나와요?” 하고 물으시다 조심스럽게 덧붙이신다. “연꽃이 너무 이뻐서 감히 찍어도 되려나&h
원효, 중국 불교에 큰 스승이후 천 명의 운제사 대중 스님들은 원효 대사를 찾아 중국에서 해동으로 넘어왔고, 이곳에서 원효의 가르침을 받고 모두 성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름 붙은 산이 양산의 천성산千聖山이고, 판자를 던진 토굴은 척판암擲板庵이라 불리게 되었다. 구전으로 전하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뚜렷한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이 뒷받침되어 있다. 하나는 원효의 화쟁사상이 중국에 큰 영향을 미쳤고, ‘신라 원효’가 중국에서 큰 스승으로 추앙받았다는 점이다. 원효의 가르침이 중국에서 온 천 명의 대중을 성인으로
지난 3월 범어사 일요법회가 창립 17주년을 맞았다. 이날 열린 법석은 지난 한 해 동안 일요법회의 법상에 오른 법사 스님들의 법문을 한데 엮은 법문집을 발간해 법공양으로 회향하며, 재가 불자들이 이끄는 대중법회의 저력을 과시한 자리이기도 했다.범어사 일요법회는 2000년 1월 재가 불자들이 나서 수행과 포교를 이끌 모임의 필요성을 느끼고, 정기적으로 법회에 참석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던 중 범어사 교수사인 홍선스님의 조언으로 탄생한 신행단체다. 그해 3월 범어사 금정불교대학 포교사회 주관으로 일요법회를 창립, 매주 불교 경전을
혜원정사 대웅보전에서는 윤달 5월 생전예수재와 백중 인연 영가 천도재를 발원하는 지장경 100일 기도를 일심으로 정진하고 있다. 법당 창밖에는 오랜 가뭄 끝에 여름을 예고하듯 단비가 내린다. 육화전과 만불전에서도 지장경 독송에 여념이 없다. 불자님들은 저마다 조상님과 인연 영가께 예를 올리고는 공양간으로 향한다. 그 속에 밝은 모습의 조연심월 보살님과 경내를 걷다 신록 속에 앉았다. “연심월 법우님은 어떤 인연으로 혜원정사에 발 딛게 되셨나요?” 하고 거두절미하고 여쭸다.“1979년이었죠. 저는 모태신앙의 기독교인이었
혜원정사에서는 매주 금요일이면 선다향실의 문이 열린다. 다인들이 펼치는 다화는 계절에 상관없이 언제든 상큼하다. 그 속에서 미소의 향기를 뿜으며 오손도손 정다운 다인들의 모습이 보인다.신미정(보안성), 신미주(자혜심) 자매와 함께 불도를 닦고 있는 김경희(금륜심), 김영희(성해월) 보살님은 두 자매의 올케다. 보안성과 자혜심 자매와 함께 네 명의 보살님이 옛적부터 이어온 혜원정사와의 인연은 매우 각별하다.보안성과 자혜심 자매는 박마니화 보살님의 두 딸로 엄마를 따라 일 년에 몇 번씩 절을 오간 것이 전부였다. 자매의 어머니는 큰며느
신록이 눈부신 여름, 연둣빛과 초록빛을 띠며 저마다 상생하여 함께 푸르다. 얼마 전 꽃의 시샘도 육근(六境, 경계)의 대상에서 물거품처럼 흩어졌다. 저마다 하얀 저고리에 꽃 한 송이 달고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인사를 나눈다. 누가 봐도 자매의 향이 짙게 퍼지는, 두 손 꼭 잡고 법당으로 향하는 이대승화, 이홍로설 자매이다. 홍로설 도반의 큰언니인 대승화 보살님은 선방에서 수행한다. 둘째 언니 자연예 보살님은 선다향에서 차를 배우다 손주를 돌보게 되어 서울로 떠나면서 자연스럽게 동생에게 자리를 물려주게 되었다. 홍로설
바랄 ‘망(望)’, 구름 ‘운(雲)’. 구름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남해 앞바다의 푸른 절경을 시작으로 굽이굽이 산길을 한참 타고 올라와 보니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듯 아득한 높이에서 펼쳐지는 도량이 놀랍다.분명 남해 앞바다에서는 사찰까지 1킬로미터 남짓 남았다고 했는데 자동차로 한참을 올라서야 도량을 마주할 수 있었다. 오직 신심 하나로 험준한 산길을 오르내리며 예경을 다 했을 무수한 수행자들이 떠올라 가쁜 숨을 쉬이 몰아쉴 수 없었다.희망을 안고 중생을 제도하는 산, 망운산의 망운사(주지 성각스님)에 올랐다.
지난 3월 백양사(주지 명본스님) 신도 화합의 구심점이 되어 줄 백양사 신도회가 결성되었다. 신도회 결성과 함께 회장으로 추대된 이영화 신도회장은 통도사 신도회 부회장을 2년간 역임하고, 국제라이온스협회 활동 등 불교계와 지역사회에서 폭넓은 행보를 이어왔다. 신도회장직 맡기를 고사했던 이 회장은 “최근 백양사의 혁신적인 변화 모습을 보고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며 마음을 내어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 회장은 지난 2008년, 백양사 인근으로 거처를 옮기며 백양사와의 첫 만남이 시작되었다. 집 근교의 가까운
“지금은 눈 감고도 예불문을 외우지만 처음부터 독실한 불자는 아니었습니다. 제가 불교에 귀 의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 이는 유일한 도반인 아내이지요.”아내를 따라 처음 도량에 발을 디딘 곳이 고성의 옥천사였다. 함께 절을 다니며 거사님이 신행생활을 시작한 후부터는 아내와 남편이 서로의 든든한 도반이 되어 주고 있다. 거사님은 사업성취 기도를 하다가 절에 오가는 횟수가 쌓일수록 불교 공부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기도에도 올바른 방법이 있을 것이라는 판단 하에 부지런히 아침저녁 예불에 동참했다. 예불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스스로
한선정인 보살님이 들려주는 혜원정사와의 인연은 제1회 화엄산림법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연히 버스를 타고 교대앞역을 지나던 중 혜원정사 화엄산림법회의 현수막을 보고 절을 찾게 되셨다고 한다. 그렇게 시작된 혜원정사와의 인연은 참다운 깨달음으로 삶의 고통 속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생애 가장 큰 가피였다고.“저는 8남매의 맏이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시동생과 시누들을 공부시키며 결혼할 때까지 시어머니와 함께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그때 당시 피눈물 나는 시집살이를 참고, 지금의 나로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부처님 덕분입니다. 혜원정사와
‘연심기묘(緣尋機妙)’. 좋은 인연이 보다 좋은 인연을 찾으니 그 발전하는 모습이 실로 기묘하다.혜원정사 만불회 정보현심 보살님을 만나고 떠오른 사자성어다. 정보현심 보살님이 들려주는 혜원정사와의 인연은 9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혜원정사 신도 중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있을까’ 할 정도로 몸과 마음이 지쳐 있을 때 혜원의 도량을 밟았습니다. 그런 저를 주지 스님께서 알아보시고는 한 통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당신의 양손이 부지런하면 그 속에서 많은 것이 샘물 솟듯 솟을 것이다.’ 그리고 스님을 친견했을 때
은사 스님과의 인연으로 시작된 선 공부현화사 주지 몽산 스님은 전국 각지의 선방에 주석하며 선 공부에 매진했다. 스님이 선 공부에 뜻을 세우게 된 데는 은사이신 동산 큰스님과의 인연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처럼 사교육이 활성화되지 않았던 옛 시절, 형편이 부유하지 않았던 청년들은 고등학교 졸업 후 낮에는 절의 살림을 거들고 저녁에는 공부를 하곤 했다. 스님도 강진의 백련사에 올라 공부에 매진했다. 당시는 불교정화운동의 깃발을 올린 동산 스님이 한국 불교의 청정 가풍을 되살리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이던 때였다.“큰스님께서는 백련사에
백양사 응진전의 꽃이 그러하다. 시간이 멈춘 듯 30여 년째 지지 않는 꽃이 피어있는 곳이다. 그 꽃은 한 번도 진 적이 없으나, 계절에 따라 색을 달리하고 세월을 좇아 모습을 바꾸며 생을 이어가고 있다. 시간을 불변에 가둬둘 순 없겠지만 누군가의 한결같은 마음이 있다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손반야지 불자님의 손끝에서 응진전 꽃들의 시간은 멈춰있다. 1989년, 방어진에 살다가 중구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주변에 교회에 다니던 친구들이 예배 전에 꽃을 사다 꽂아두는 것을 보고 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