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사보다 더 먼저 뿌리를 내려 이곳을 지키고 있던 소나무. 가지는 굽었지만 가지 끝엔 기개가 넘친다. 지리산의 품에서 산세를 빼닮은 나무는 그렇게 도량을 지키는 호법수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청송사의 역사는 채 50년이 되지 않는다. 한 노부부가 기도하며 살던 터를 스님께 공양 올리며 부처님을 모시게 됐다. 그리하여 창건주이신 형우스님은 터에 요사를 짓고 수행하는 도량으로 삼게 됐고, 지금의 주지 명국스님이 중창하며 지리산하에 안정된 도량을 일구게 됐다.

 

“지리산은 어디에 앉아도 풍경이 좋다 해요. 앞으로 보이는 산세가 정말 좋죠. 마치 어머니 치마폭으로 자식들을 포옥 감싸는 것처럼요. 청송사도 지리산처럼 많은 인연을 감싸 안을 수 있는 도량이 되길 바라고 있어요.”

명국스님이 청송사에 온 지는 22년, 출가 전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기에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았고, 출가 후 계속 해인사에서 살았기 때문에 한 절의 살림을 맡아 사는 일은 낯설고 어려웠다. 청송사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80세는 넘어 보이는 할머니가 스님을 찾았다.

“‘3만원이오.’ 하도 거칠어서 쩍쩍 갈라진 손끝으로 만 원짜리 세 장을 들이미시는 겁니다. 너무 놀라서 한사코 돈 받기를 거절했는데, 어르신 말씀이 ‘우리 자식 기도비니 꼭 좀 받아주소.’ 하는 거에요. 앉아서 얘기를 듣다 보니, 그 보살님이 3만원을 모으기 위해 복조리를 만들어 팔았답니다. 산에서 직접 산죽을 끊어다가, 그걸 쪼개고 나누고 비벼서 1개를 겨우 만드는데 50다발을 만들어서 번 돈이래요. 그런데 50다발이면 복조리 300개예요. 3만원 기도비를 마련하려고 그 어르신이 손끝이 갈라져라 복조리를 만든 겁니다. ‘아, 시줏돈은 함부로 써서는 안 되겠구나.’”

이후로 스님은 신도들에게 기도비 외엔 일절 받지 않고 불사를 하겠노라 다짐했다. 기왓장 한 장도 신도들 돈을 받을 수 없다는 철칙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시작됐다. 간장, 된장, 고추장부터 시작해 차, 꿀에 이르기까지 지리산에서 나는 건 죄다 팔았다. 하루는 상좌가 물었다.

“스님, 장사하기가 부끄럽지 않으세요?”

부처님께서 장사하지 말라고 당부하셨거늘, 상좌의 걱정은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말했어요. 절대 부끄럽지 않다고. 나는 부처님을 등에 업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요. 내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라 부처님을 모시고 불사를 일으키는 일인데 하지 못할 일이 어딨겠습니까.”

스님의 공심, 진심이 통했는지 불사를 일으키고 도량을 넓히는 만큼의 수익이 생겼고 사찰 운영에도 큰 보탬이 됐다.

스님의 두 번째 철칙은 밖에서 시도를 접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대로 얘기하자면 모든 사람들을 사찰 안으로 불러온다는 얘기다. 여기에도 특별한 사연이 있다. 청송사를 둘러보면 방사가 유독 많다. 명국 스님을 비롯해 상좌 두 스님, 공양주도 없이 세 분만 사시는 곳에 왜 이리 방사가 많은가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누구나 와서 쉬어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시작이었고, 그 누구나에는 육신의 고통을 안은 환자들이 대표적이었다.

“서른 초반의 아가씨가 절에 온 적이 있어요. 만성결핵을 앓고 있었는데, 종교를 잘못 가지는 바람에 치료 시기를 놓쳐 버리고 말았지요. 어머니가 청송사에 아가씨를 데려와서는 요양하게끔 도와달라 하셨지요. 그때 간질을 앓고 있던 분도 여기에 머물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밥을 먹다가 간질 환자가 경련을 일으키며 다 토한 겁니다. 그런데 그 아가씨가 눈 하나 찌푸리지 않고 맨손으로 토사물을 걷어 내고 바닥을 말끔히 치웠어요. 저는 예전에 장애인 봉사를 하러 갔다가 갑자기 뛰어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무서워서 버스 안에 숨어 있던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의 제 부끄러웠던 기억과 그 아가씨의 모습이 겹쳐지니 뭔가 머리를 탁 쳤어요. 안타깝게도 몇 년 지나지 않아 아가씨는 세상을 떠났는데, 직전까지도 대중이 꺼려하고 싫어하는 일을 묵묵히 해내더라고요. 어쩌면 우리는 받을 줄만 알았던 건 아닌지. 인연이 된다면 아픈 분들이 이곳에서 조금이나마 쉬어 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방사를 많이 두었어요.”

템플스테이가 아닌가 하고 되물었더니, 그저 정말 ‘쉬어 가는 곳’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스님 세 분이 돌보기에는 울력이 만만치 않다. 그래서 생각해 낸 고안이 기도 3시간, 청소 1시간이다. 초하루에 청송사를 찾은 신도들이라면 기도를 1시간 줄이고 청소를 1시간 더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누구 하나 싫은 기색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울력에 동참하고 있다. 덕분에 도량을 가꾸고 돌보는 이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지리산은 덕산德山이라고 해요. 큰 덕 자를 쓰지요. 하도 커서 모든 것을 다 포용한다는 겁니다. 밖에 나갔다가 들어와도 편안한 모습에 미소가 절로 나옵니다. 저 나무 보이시지요? 제목이 되지 못했기에 대들보로 쓰이지도 못하고, 땔감으로도 못 쓴 채 오랫동안 묵어 살았어요. 산승은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청송의 나이만큼 청송사도 오랫동안 함께 익어 갔으면 좋겠습니다.”

나무를 몇 번이나 다시 들여다본다. 굽이지고 굴곡진 마디마다 어찌 사연이 없을까. 반듯하게 풍파 없이 살아갈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세월의 역경을 새긴 마디 덕분에 저렇게 멋드러진 가지를 뻗어 냈을 것이다. 인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저마다의 사연이 인연을 맺고 맺어, 언젠가 멋드러진 삶의 줄기를 완성할 터이다. 청송사에 그 인연이 켜켜이 쌓여 ‘저곳 참 잘 익어 가는 도량이다’라는 누군가의 탄성이, 청송이 아닌 청송사를 두고 먼저 나올 것이라 미리 짐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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