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눈 감고도 예불문을 외우지만 처음부터 독실한 불자는 아니었습니다. 제가 불교에 귀 의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 이는 유일한 도반인 아내이지요.”

아내를 따라 처음 도량에 발을 디딘 곳이 고성의 옥천사였다. 함께 절을 다니며 거사님이 신행생활을 시작한 후부터는 아내와 남편이 서로의 든든한 도반이 되어 주고 있다. 거사님은 사업성취 기도를 하다가 절에 오가는 횟수가 쌓일수록 불교 공부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기도에도 올바른 방법이 있을 것이라는 판단 하에 부지런히 아침저녁 예불에 동참했다. 예불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스스로 발심하게 된 것이다. 이동 중에는 테이프를 틀어 놓고 염불과 정근을 하며 스스로 불교 공부에 이르렀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파고드니 모든 예불문을 섭렵하는 것은 물론 예불의 높낮이까지 파악하게 됐다고.

“사업 초창기에는 일과 기도를 병행했습니다. 기도를 하면 할수록 기도에 탄력이 붙고 자연히 공부에도 재미가 붙더군요. 화엄경, 화엄경 약찬게 등 외우지 못하는 예불이 없을 정도로 불교 공부에 흠뻑 젖었지요. 그때 발심하여 공부를 시작한 것이 불자로서 아주 든든한 밑천이 되어준 것 같습니다.”

그렇게 아침저녁 예불에 부지런히 참석하며 신심을 닦은 거사님에게도 위기는 도래했다. 불교를 잘 알고 있다는 자만에서 비롯된 아상에 빠져 있을 무렵 사업에 위기가 닥쳤다. 달리 손쓸 방도가 없이 사면초가에 빠진 거사님은 늦은 밤 울산 문수사에 올라 부처님 앞에 섰다. 부처님을 향해 시작된 원망은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들 일체가 고통 받는다는 생각에 소리 없는 울부짖음으로 변했다.

가족들에게만큼은 큰 피해가 가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거사님은 마음을 다잡고 일심으로 기도를 올렸다. 일념으로 기도에 빠져 있느라 시곗바늘이 새벽 3시를 가리킬 때까지도 알지 못했다고 한다. 다음날 날이 밝고 거사님은 10여 년 전 인연을 맺은 지인을 만나게 된다. 그가 귀인이었는지 그와의 만남 이후로 모든 직원이 손 모아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을 다졌다. 기도를 통해 부처님의 가피를 경험하고 나니 일심을 다했을 때 부처님이 성불을 주신다는 깊은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고.

“부처님께는 수백억의 제자들이 기도를 올리기 때문에 오직 나를 살려 달라는 간절한 일념으로 기도에 온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것을 깨달은 후부터는 자세가 180도 달라졌습니다. 술과 담배를 끊은 것은 물론 절을 오갈 때마다 항상 법복을 입고 다니게 되었지요.”

한우구 거사님이 울산 백양사(주지 명본스님)와 인연을 맺은 지는 5년째에 접어든다. 한동안은 아침에는 문수사, 점심에는 통도사, 저녁에는 백양사를 순례하며 매일 자기집중에 들어서기도 했다. 거사님 이 꼽은 올해의 화두는 ‘건강, 가족, 이웃을 돌아보는 것’이라고 한다.

“사업으로 인해 바쁜 와중에도 초하루에서 초3일간 백양사의 다라니기도에 동참하며 나와 내 주변을 위한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기도가 끝나고 나면 응진전에 모시고 있는 신중님들께도 지극히 기도를 올리지요. 백양사는 많은 불자들의 지극한 신심이 모여 도량 곳곳에 청정한 기운이 깃들어 있습니다.”

인터뷰 내내 거사님은 “불자는 정신을 한데 모아 일념으로 기도에 들어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도를 통해 부처님의 가피를 입는 것은 기적이며, 그 기적은 나 스스로 온전한 불자로 서의 자세가 갖추어졌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기도는 외로운 길이며 혼자서 꿋꿋이 나아가야 한다고. 오랜 세월이 사찰을 명당으로 만든다. 거사님의 말처럼 많은 불자들의 염원이 도량에 내려앉아 있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내려오는 길, 거사님의 마지막 말씀이 오래도록 마음속에 맴돈다. ‘부처를 닮아 가라. 기도는 부처의 마음으로 부처가 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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