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암괴석과 어우러지는 망운산 풍경.

바랄 ‘망(望)’, 구름 ‘운(雲)’. 구름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남해 앞바다의 푸른 절경을 시작으로 굽이굽이 산길을 한참 타고 올라와 보니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듯 아득한 높이에서 펼쳐지는 도량이 놀랍다.

분명 남해 앞바다에서는 사찰까지 1킬로미터 남짓 남았다고 했는데 자동차로 한참을 올라서야 도량을 마주할 수 있었다. 오직 신심 하나로 험준한 산길을 오르내리며 예경을 다 했을 무수한 수행자들이 떠올라 가쁜 숨을 쉬이 몰아쉴 수 없었다.

희망을 안고 중생을 제도하는 산, 망운산의 망운사(주지 성각스님)에 올랐다.

망운사 전경.

망운사는 고려 중기 원효 대사가 창건한 연죽사를 진각 국사가 현재의 화방사 근처로 옮겨 중창하고 망운암을 창건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후 효봉, 경봉, 서암, 월하스님이 수행을 거쳤다.

망운사에서 오랜 기간 주석한 성각 스님은 1980년대 다 쓰러져가던 망운암을 꾸준한 중창 불사를 통해 현재의 여법한 도량으로 일구었다. 그리하여 2008년 망운사로 승격되어 쌍계사의 말사로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망운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인 약사전.

석조 일주문을 들어서면 오른편으로 가장 오래된 전각인 약사전을 시작으로 보광전, 산신각 등 여러 전각이 눈에 띈다. 도량 곳곳에서는 역시나 쌍계총림 방장 고산 대종사의 흔적이 여실히 묻어난다. 큰스님의 서체로 선열당, 안심료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와 함께 국내 유일 선서화(禪書畵)분야 무형문화재인 성각스님의 작품이 보관되어 있는 금당 갤러리까지 도량 전체가 선화로 만나는 느낌이다. 정갈한 자태의 도량은 수행자로서의 자세와 선화가로서의 작품 세계관이 함께 상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성각스님.

40여 년의 세월을 남해에서 보내며 현재의 망운사를 여법하게 일구어 낸 성각스님은 “전생에도 가람을 우뚝 세워야겠다는 원력을 세운 게 아닐까.”라고 말한다. 전생에도 중노릇을 했으니 이번 생에 중노릇을 피해갈 쏘냐라는 것이 스님의 말이다.

그렇게 남해 바다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아 중창 불사를 하나씩 이루어 갈 때마다 마음의 성품을 바로 보는 것, 그 자체가 성불의 사다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 수행관은 곧 스님의 작품 세계관으로도 이어진다. 포교를 하는 것은 부처님의 전사자로서 응당해야 할 책무이므로, ‘어디든지 가서 나의 감로수와 같은 진리를 설파하거라.’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따라 스님은 일평생 선화를 통해 불법 홍포를 이어왔다.

선화 '관음의 미소'.

“선화의 본질은 어떤 한 현상이 있을 때 선적인 자세를 선화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선화는 자신의 상을 다 버리고 입문하여 실력을 쌓는 어려운 공부입니다. 부처님 법을 통해 닫혀 있던 안목이 열리는 것처럼 무궁무진한 진리법을 발견하는 것이 선서화의 큰 장점이지요.”

사물이나 실체를 있는 그대로 점과 선 하나로 잇는 선화는 어쩌면 우리가 추구하는 사찰의 모 습이자 수행자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다. 이에 스님은 말한다.

“수행의 근간을 이루기 힘든 요즘과 같은 현실 속에 선화란 참선의 결과물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오로지 고요 속에서만 그려질 수 있기 때문이지요. 한 생각 화두를 들고 몰두하지 않으면 그림이든 수행이든 무엇도 되지 않습니다.”

남해를 선화의 본산지라고 했다. 한 폭의 선화를 닮은 망운사의 도량은 가을까지 운해가 장천이라고 한다. 비가 올 때는 안개꽃이 드리워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장관이 펼쳐지기도 하는 곳이다.

남해의 주산인 이 망운산은 어머니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기 위해 가슴을 내놓고 아이를 품은 모습을 닮아 있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매일 아침 새로운 희망을 드리우는 망운사, 닫혀 있던 안목을 열어젖히고 진리를 설파하는 귀한 도량으로 오래도록 남아 주기를 바란다.

저작권자 © e붓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