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전국의 선원에서 일제히 병신년 동안거 해제를 맞았다. 석 달간 이어진 수행 정진의 열기가 한겨울 추위를 녹이더니 어느새 봄을 불러왔다. 선방에는 스님들뿐만 아니라 재가불자들도 참여해 안거의 뜻을 함께 이어 갔다. 동래구 온천동에 위치한 현화사(주지 몽산 스님)는 안거철 이외에도 참선 수행에 열을 올리는 불자들로 가득하다. 폐사 직전이었던 도량이 매일열 명 이상의 불자가 오가는 수행 도량으로 모습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은 일평생 ‘참선’의 맛을 보며 지혜를 터득한 스님의 원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부산 현화사 주지 몽산 스님.
  • 은사 스님과의 인연으로 시작된 선 공부

현화사 주지 몽산 스님은 전국 각지의 선방에 주석하며 선 공부에 매진했다. 스님이 선 공부에 뜻을 세우게 된 데는 은사이신 동산 큰스님과의 인연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처럼 사교육이 활성화되지 않았던 옛 시절, 형편이 부유하지 않았던 청년들은 고등학교 졸업 후 낮에는 절의 살림을 거들고 저녁에는 공부를 하곤 했다. 스님도 강진의 백련사에 올라 공부에 매진했다. 당시는 불교정화운동의 깃발을 올린 동산 스님이 한국 불교의 청정 가풍을 되살리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이던 때였다.

“큰스님께서는 백련사에 대한 애정이 깊으셨습니다. 불교정화운동에 앞장서면서 여러 가지 골치 아픈 일이 많았지만 한국 불교의 위상을 세우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셨지요. 스님은 공부하러 절에 왔다는 저에게 불교 공부를 권하셨습니다. 당시는 경제가 어려워 농사를 짓는 집이 많았기에 불교와의 인연을 긍정적으로 생각했지요. 스님께서는 ‘세상의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그 맛을 참선에 견줄 수 없다. 한번 해 보지 않겠느냐.’며 참선 공부를 권하셨습니다.”

그 후 스님은 동산 큰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스님과의 첫 인연을 맺은 백련사에서 주지 소임을 맡기도 했다.

스님은 범어사 강원에서 1년 수학하고 선방으로 향했다. 동산 큰스님이 말씀하신 참선의 맛을 보기 위함이었다. 큰스님이 주석하시던 때의 청풍당은 규율과 질서가 철저했다. 훌륭한 은사 스님 아래에 있으니 범어사에서 왔다고 말하면 물어보지도 않고 방부를 내어 주곤 했다. “가정에도 큰 어른이 계시면 집안의 가족들이 어디를 가든 각자 맡은 자리를 지키면서 사고를 치지 않지요. 절 집안도 마찬가지로 어른이 있으면 질서가 잘 지켜집니다. 그래서 훌륭한 스님을 모시고 가풍을 이어받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승속 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랜 도반인 지유 스님과는 젊은 시절 걸망을 지고 만행을 두루 떠나기도 했다. 봉암사에서는 지유 스님, 무비 스님과 함께 주석하며 도량을 정화하고 선방의 터를 닦았다. 6 · 25 사변 이후 대처승이 점거해 엉망이 된 도량을 스님들과 함께 몇 년의 세월에 걸쳐 정화에 힘을 보탰다. 먹을 것이 궁했던 어렵고 힘든 시절, 도반 스님들과 함께 자급자족하며 선방에서 정진했던 일은 아직도 선명하다.

 

  • 올바른 성인의 가르침에서 깨닫는 참선

오로지 선 공부에 뜻을 세우고 정진한 몽산 스님은 참선을 배우게 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스님은 자고로 공부 잘하는 이를 따라다녀야 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사회가 도래하면서 돈이나 물질을 좇는 스님들이 많아졌습니다. 좋지 못한 현상입니다. 스님으로서 수행이 아닌 자본을 좇아다니는 것은 분명 반성해야 할 부분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숱한 선택의 순간을 맞이한다. ‘그때 만약 그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과거의 선택에 한 번쯤 미련을 가지게 된다. 얼마만큼의 공부와 수행을 거치면 아주 작고 사소한 미련까지도 온전히 벗어던질 수있는지 여쭈었다. “옛 선택의 미련을 온전히 벗어던질 수 있는 시점은 없습니다. 젊은 시절 참선을 선택하지 않고 또래의 청년들처럼 글 공부를 했다면 어땠을지 한 번씩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불교에 귀의하고 깨달은 것은 ‘올바른 성인의 말씀은 틀림이 없다.’라는 겁니다. 지나서 생각해 보니 삿된 생각은 잠깐이라는 큰스님들의 말씀이 모두 틀림없는 사실이더군요.”

단출한 현화사 도량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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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 그 자체가 바로 선이다.”

그렇게 일평생 참선에 몰두한 스님이 지금의 현화사를 도심 속 수행 도량으로 일구기까지는 10여 년이 걸렸다. 처음 현화사를 찾았을 때 절은 폐사 직전의 모습이었다. 불사에 뜻을 세우고는 본래 보현사였던 사명을 ‘진리로 돌아간다.’는 뜻의 현화사로 변경하고 대웅전은 중수하고 삼성각은 새로 지었다. 어른 스님들의 검소한 삶을 본받아 토굴처럼 살다가 자연스러운 인연으로 선방에 방부를 들인 불자들의 수행을 지도하고 있다.

불자들의 발우.

“현화사는 초하루와 보름에 법회를 합니다. 중간에 폐사해서 그런지 신도는 많지 않지만 매일 좌선하기 위해 선방에 들어서는 불자님들이 있지요. 오전과 오후 2시간씩 12명의 불자를 지도하고 있습니다.” 현화사 선방에서 좌선하는 불자들은 평일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4시까지 참선과 포행, 차담을 가진다. 참선 후에는 인근의 금강공원에 올라 주지 스님과 포행에 나선다. 스님은 불자들에게 공부란 항상 적적해야 한다고 당부한다. 생각이 산란하지 않고 가만히 좌선할 줄 아는 것이 제대로 된 공부의 자세라고. 생각이 온갖 곳으로 왔다 갔다하는 와중에 집중하고 정에 들어야 온전히 참선이 되는 것이다.

“포교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경전을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달마 대사의 가르침인 이입사행(二入四行) 가운데 이입은 경전 공부로 이치를 깨달아 도에 들어가는 노선을 말합니다. 따라서 마음을 항상 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이라 우리가 일상을 사는 것 자체가 선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밥 먹고 직장에 다니며 일하고 생활하는 그 자체가 알고 보면 선이라는 말입니다. 그것 말고는 따로 없습니다.”

현화사는 주불을 모시고 있는 대웅전과 스님께서 불사한 삼성각, 선방과 함께 쓰고 있는 요사채가 전부이다. 단출한 도량에 조금 욕심을 내자면 요사채를 2층으로 증축하여 선방을 올리는 것이 스님의 바람이다. 인근 주민들이 자유롭게 와서 앉아 있다가 갈 수 있는 시민 선방을 여는 것. 소박하지만 참다운 불교 정신의 기틀이 자리 잡힌 참선도량을 갖추는 것이 단 하나의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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