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만불전에서 자비도량참법기도에 동참했던 이원명성 법우님께 눈인사를 건네자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이신다. 법회를 마치고 보살님과 함께 절 뒤뜰에서 따뜻한 햇볕을 등지고 앉았다. 잠시 염주를 놓고 지난날의 신행 발자취를 회상하는 보살님의 얼굴이 꽤 상기된 표정이다.

“젊은 사람이 예쁘지, 늙은이 사진 찍어서 뭣하게. 보기 싫어.”라며 연거푸 인터뷰를 거절하셨지만, 보살님의 가방에 달린 작은 목탁이 귀엽다며 화제를 돌리자 자연스럽게 대화가 풀렸다.

“아이고, 이거 큰스님이 직접 달아 주셨어. 이 가방에 달고 다니라고.” 하며 웃으신다. 그 말씀에 혜원정사와의 첫 인연을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한 40년 됐지 싶습니다. 당시 나는 대신동 보타원에서 회장을 20년간 역임했어요. 감사패를 두 번 받을 정도로 열심히 했지요.”

그때는 신도들이 많아서 법회 때마다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조계종 종정에 세 번 추대되신 고암 스님께서 보살님께 고산 스님이 주석하시는 혜원정사에 가서 열심히 공부를 해보라고 권유를 하셨다고.

“그때 고암 스님의 권유를 받고 혜원정사 육화전에서 기도를 했습니다. 젊어서는 보타원에서 청춘을 다 보내고, 중년에 혜원정사에 와서 지금은 노년을 보내고 있지요.”

보살님은 5년 전에 거사님을 먼저 보낸 후, 이제는 육화전에서 영가 기도를 통해 거사님을 만나고 있다고 덧붙였다. 노년을 보내고 있는 지금, 육체는 쇠약해졌어도 마음만큼은 청년들 못지않다고.

“초년에 부처님을 만난 행운으로 평생을 부처님 덕분에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말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지요.”

젊은 날 불연을 맺은 것이 가장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라고 말하는 보살님께 기도는 무엇인지 여쭈어봤다.

“기도는 수행(修行)하는 것입니다. 방일하지 않고 행(行)하므로 이루는 것입니다. 불교에 귀의한 후 수없이 많은 행을 이루었지요. 아들 삼형제와 딸을 낳아서 반듯하게 키웠고, 자식들이 좋은 배필을 만나 손주들까지 반듯하게 키울 수 있도록 열심히 기도했어요. 부처님의 가피 덕분인지 손주들이 모두 영특하여 국내와 해외의 명문 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이보다 더 뿌듯한 일이 있을까요?”

보살님은 손주들이 할머니를 따라 부처님을 믿으며 법음을 듣고 자랐더니 인성도 반듯하여 나무랄 게 없다고 덧붙이신다. 부처님의 가피를 말로 다할 수 없다는 보살님은 부처님께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원을 세우고, “항시 필요한 자리에서 제가 맡은 역할을 수행하여 조금이나마 부처님께 은혜를 갚게 해 주십시오.” 하고 발원했다고 한다.

“혜원정사에서 백일기도를 올리고 회향하고를 계속 반복하고 있습니다. 백일기도는 평생 나의 수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혜원 불자님들께도 백일기도를 권하고 싶습니다. 부처님의 가피 아래에 선행을 닦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요.”

절에서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수행은 이어진다. 관음기도부터 관세음보살보문품 독송, 관음 정근, 명상까지 보살님에게는 오직 부처님 생각뿐 다른 생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집안이 편안하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마음이 가벼워지니 길을 걸어가도 앉으나 서나 오직 부처님 생각에 늘 행복합니다.”

40년 간 이어온 신행 생활로 보살님의 일생이 수행 그 자체이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고암 스님께서 혜원정사에 가서 공부 하라고 하신 말씀이 마치 어제 들은 것처럼 생생합니다. 그러니 제 나이가 지금 80대 중반인데 다리가 무거워도 택시를 타고 올 라와서 법당에 앉아있지요.”

이원명성 보살님은 오직 ‘행해야 한다’는 단 한 생각뿐이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터뷰가 끝나고 보살님의 마지막 말씀을 떠올리면서 수행에 대한 의지를 더욱 확고히 다지며 사천왕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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