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토굴에서 좌선에 들었던 원효 대사가 천안통으로 멀리 중국 종남산을 내다봤다. 원효는 종남산 운제사의 대웅전이 무너지고 있는 모습을 들여다보고는 옆에 있던 판자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위에 여덟 글자를 적었다. ‘해동원효척반구중海東元曉擲盤救衆’.

북쪽 하늘로 힘껏 던진 판자는 곧바로 운제사로 날아갔다. 판자는 운제사 앞뜰 공중에서 뱅글뱅글 돌았다. 예불을 마친 스님들은 신기한 광경에 대웅전 밖으로 나와 앞뜰에 모여들었다. 무려 천 명의 대중이었다. 모두 대웅전에서 나오자 판자는 땅 위로 떨어졌고, 곧바로 대웅전은 대들보가 무너지면서 그대로 주저앉았다. 깜짝 놀란 스님들은 판자에 적힌 문구를 읽었다. ‘해동에 있는 원효가 판자를 던져 대중을 구하노라.’ 크게 감동받은 운제사 스님들은 그렇게 신라 원효 대사의 천안통 덕에 목숨을 구했다.

 

  • 원효, 중국 불교에 큰 스승

이후 천 명의 운제사 대중 스님들은 원효 대사를 찾아 중국에서 해동으로 넘어왔고, 이곳에서 원효의 가르침을 받고 모두 성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름 붙은 산이 양산의 천성산千聖山이고, 판자를 던진 토굴은 척판암擲板庵이라 불리게 되었다. 구전으로 전하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뚜렷한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이 뒷받침되어 있다.

화쟁사상을 널리 펼친 원효 대사 진영.

하나는 원효의 화쟁사상이 중국에 큰 영향을 미쳤고, ‘신라 원효’가 중국에서 큰 스승으로 추앙받았다는 점이다. 원효의 가르침이 중국에서 온 천 명의 대중을 성인으로 이끌었다는 내용은, 실로 천 명이라는 구체적인 숫자뿐만 아니라 천 명 이상을 교화시킨 큰 가르침이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두 번째는 장안사와 척판암이다. 척판암은 장안사의 산내 암자다. 장안사를 살펴보면 여러 동의 요사채가 있었던 흔적이 나타나는데, 이는 수많은 대중이 운집해서 살았다는 증거다. 원효의 가르침을 받고자 장안사에서 수행하던 스님들이 있었으며 척판암은 원효 대사가 머물렀던 조실채의 역할을 했을 것이라 짐작 되고 있다. 장안사 주지 정오스님은 “원효 대사는 조실채인 이곳에 머무르면서 장안사 대중들에게 가르침을 폈을 것”이라며 “동해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좌선대에 앉아 고요히 선정에 들었을 스님의 모습이 그려진다.”고 설명했다.

 

  • 효봉, 혜암스님 머물렀던 정진처

척판암은 불광산 팔부능선쯤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서 20년 동안 주석한 보일스님의 말을 빌리자면, 암자를 중심으로 좌청룡이 일곱 겹을 감싸고 있어 기도와 공부하기에 좋은 정진처다. 반대로 우백호는 재물과 명예를 상징하지만, 불광산 기슭에는 백호의 기운이 없다. ‘공부를 해야만 오래 살 수 있는 곳’이라는 게 보일스님의 설명이다. 그래서인지 해인사 방장을 역임한 혜암스님도 이곳에서 1년 동안 주석했고, 효봉스님도 한철, 성흥사 회주 영환스님도 2년 동안 머무르는 등 많은 선방 수좌 스님들이 오가며 정진 처로 삼았다. 풍수적으로도 영락없는 공부 도량이지만 과거에는 한번 탁발해 오면 다시 나갈 길이 막막할 정도로 첩첩산중이었던지라 세속과의 연을 끊고 조용히 은거하기에는 이만한 곳이 없었다고 한다.

척판암 법당에 모셔진 삼존불.

현재 소실되긴 했지만 이곳에 대방광불화엄경 목판본이 보관되어 있었다. 낡고 오래된 책이었지만 스님들의 공부에는 더없이 좋은 도반이었다. 범어사 수좌 인각스님이 강당에서 책을 볼 때 범어사에 화엄경에 없어서 척판암에 있던 80화엄경을 빌려다 봤다는 이야기도 있다. 귀한 목판본 책을 암자에 보관하고 있었다는 것도 이곳을 오갔던 수많은 공부인들의 흔적이 남아 있음으로 알 수 있다.

 

척판암에서 20년 주석한 보일스님.
  • 불광산佛光山에 새벽이 밝다

그렇다면 원효는 왜 하필 이곳에 터를 잡았을까. 원효 대사는 장안사를 중심으로 영남 일대의 교화에 힘썼다. 다른 지역에도 원효의 흔적이 여럿 남아있 지만, 특히 기장군이 눈길을 끄는 것은 머문 일대가 비교적 상세하고 척판암(당시 조실채로 추정)의 존재가 뚜렷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불광산이라는 이름은 원효 대사가 지은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여러 설이 있지만, 간절곶보다 일출이 30초 빨라 새벽이 가장 먼저 찾아오는 곳이라는 이유가 가장 명확하다. 원효 대사의 효曉가 새벽을 뜻하는 것과 맞닿아 있다. 물론 천년도 더 된 과거의 일이라 구체적인 유적은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지난 1937년 조성된 원효 대사의 진영으로 보아 당시에도 원효 대사가 척판암에 주석했고 창건했다는 이야기는 거의 기정사실로 보인다. 절벽 끝, 제비집처럼 자리 잡은 작은 암자는 “말이 통하지 않고 무심으로 끊어지는 곳”이기에 원효의 안목에 들었을 것이다.

차담을 나누는 정오 스님과 보일 스님.

 

  • 고요와 적정이 교차하는 곳

척판암은 아주 가파른 절벽에 위치해 있다. 근래 중창불사를 하기 전에는 법당 바로 앞이 절벽이라 기둥을 붙잡고 건너지 않으면 자칫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낭패를 볼 정도였다. 다행히 불사를 하면서 1미터 정도 앞으로 터를 더 낸 덕에 위험은 줄었지만 고개를 조금만 내밀고 보면 높이가 아찔하다. 불광산을 자주 오르는 등산객이 아니라면 눈에 잘 띄지도 않고, 우연히 들르는 길손이 아니라면 굳이 척판암만 보고 찾아오는 이는 드물다. 발걸음이 끊어지고 고 요함만이 남은 암자에서 보일 스님은 20년을 주석했다. 스님은 젊은 날 주로 전국 선원에서 해제와 결제를 거듭하며 정진했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해제 없는 결제다. 외딴 곳, 고요와 적정이 교차하는 곳에서 스님은 포행과 참선으로 매일 방부를 들이고 있다.

고요와 적정이 교차하는 척판암 법당.

원효가 던진 판자는 중국 운제사 스님들을 위험으로 부터 구했다. 그들을 구한 것은 단순한 판자가 아니라 화쟁의 사상이요, 가르침이었다. 오늘날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은 바로 그 ‘척판’이다. 분쟁이 끊이지 않는 세속의 번다함 속에 시원스레 화쟁의 판자가 날아온다면 필히 우리를 구제할 방편이 되어 줄 것이다.

저작권자 © e붓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