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은 출가하고 도 닦는 것만으로 공양 받는 대상이 되어야 한다. 재를 지낼 때도 스님은 높은 데 앉고, 재가 불자들이 와서 스님들께 공양을 올려야 본래의 의미에 맞다. 하지만 우리는 반대로 영가를 위에 모시고 스님은 밑에서 염불을 올리는 것을 당연시 하고 있다. 이것은 유교적 관점에 따른 것이므로, 앞서 언급했듯 스님께 공양을 올리는 게 더 불교적이라 할 수 있다.

스님은 부처님의 제자다. 재를 올리는 이유가 부처님께 잘 보여서 좋은 곳으로 보내드리기 위함이라면 당연히 부처님의 제자인 스님들께 잘 보여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재를 올리는 이유와 누구에게 공양을 올려야하는지 알아가는 단계부터가 공부의 시작이다.

우리가 할 공부는 ‘사마타 위빠사나’다. 사마타는 마음 집중이고, 위빠사나는 지혜를 의미한다. 둘 다 중요하지만 그 중에서도 지혜가 중요하다. 지혜란 정보가 축적되어 있어서 어느 상황을 만났을 때 수월하게 대처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관세음보살을 계속 부르면 염불삼매에 이를 수 있다. 또 설거지만 열심히 해도 삼매에 들 수 있다. 삼매, 즉 마음집중은 방법에 구애받음이 없다. 하지만 지혜는 다르다. 불교는 지혜의 종교로서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나는 대승불교에서 30년을 공부했으며 소승불교로 20년을 공부했다. 그 결과 대승과 소승을 다 합친 것이 불교라는 인식을 갖게 됐다.

뉴턴의 만유인력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 빗대면 쉽다. 소승불교가 만유인력이라면 대승불교의 교리와 교의적 사상은 상대성 원리다. 만유인력이 본래 존재했던 자연의 원리를 발견해낸 것이라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는 지금도 계속 발전되고 있다. 마치 교리가 부처님 시대부터 지금까지 계속 발전하고 있듯 말이다. 중생을 제도하고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겠다는 원력을 세웠을 때 소승은 ‘나부터’ 시작한다면 대승은 ‘구조적’으로 고쳐야 한다고 말한다. 위빠사나를 공부하는 것은 소승적 자기탐구다.

나는 대승과 소승을 이렇게 얘기하고 싶다. 대사회적으로 불교는 ‘대승적 사회참여’로서 역할을 해야 하며 자기수행은 아주 고답적인 소승으로 한다. 즉 자기탐구는 부처님 시대를 원형으로 삼고, 포교는 대승적 사회참여로 해야 한다는 뜻이다.

오늘날 한국 불교는 아주 번다하다 싶을 정도로 발전해 있다. 마치 농장의 과일 나무가 마음대로 가지를 뻗은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가지가 많으면 열매를 많이 맺을 것 같이 착각하지만, 농부는 제대로 된 결실을 맺게 하기 위해 봄에 가지를 쳐내는 전정 작업을 한다. 그래야 나무가 제 역할을 해내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대승불교는 마음대로 큰 과일나무와 같다. 200여 개가 넘는 종파가 난립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미얀마, 태국에서 불교를 한 사람들은 한국불교에 대해 부정적이다. 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한국불교처럼 기도를 중시하고, 자기수행을 열심히 하는 불교도 없다. 다른 나라의 불교를 얘기할 때 좋은 점만 얘기해서 상대적으로 우리 불교에 대한 자긍심이 떨어질 수 있지만 실제로는 충분히 우수한 불교라는 점을 주지해야 한다.

우리 대승불교가 발전해서 많은 가지를 뻗었다면 그것을 충분히 전정해서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다. 그렇다면 전정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무를 잘 키우는 법에 대한 교본이 나와 있듯 훌륭한 교본에 따르면 된다. 바로 ‘근본불교’를 그 교본으로 삼아야 한다. 근본불교를 교본으로 삼고 대승불교의 잔가지를 정리해야 바른 불교가 올바르게, 오래토록 전승될 수 있다.

우리가 자주 얘기하는 ‘힐링’은 미국에서 유행해 우리나라로 건너왔다. 서구의 생활 형태가 한국으로 유입되면서 미국에서 유행하는 ‘치유 불교’가 한국으로 건너온 것이다. 바꿔 얘기하면 불교가 역수입 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불교는 예방이 아닌 치유의 차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불교처럼 자기 수행을 통한 근원적인 치유가 아니라 병이 난 몸과 마음을 고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미국 불교가 한국 사회에 역수입 되고 있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요즘 주변에서 힐링강사를 많이 만날 수 있다. 요가, 음악, 명상 등을 차용해서 힐링을 지도해 주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힐링 강습이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으나, 우리의 근원적인 괴로움을 걷어낼 수는 없다. 근원적인 괴로움의 뿌리를 완벽하게 걷어내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수행 방법이 필요하다. 최근 나오고 있는 치유에 관한 수많은 서적들은 국부 치료에 불과하다. 당장 이해하기 좋은, 아이들이 먹기 좋은 달달한 시럽약 같은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근원적인 고통의 뿌리까지 걷어내는 심층적인 한국 불교에서의 치유란 무엇을 뜻하는지 깊이 공부해볼 필요가 있다.

 

* 이 내용은 2월 12일 도현스님께서 연암토굴에서 불자들에게 설하신 법문을 정리한 것입니다. 법문은 다음에 계속 이어집니다.

                                                          

도현 스님은
범어사 덕명 스님을 은사로 1963년 부산 범어사에서 입산 출가했다. 1965년 동산 스님에게 사미계를, 1972년 범어사에서 석암 스님에게 비구계를 받았다. 제방선원에서 30여년간 정진했으며 태국에서 5년 동안 위빠사나 수행을 체득한 스님은 현재 지리산 연암 토굴에서 홀로 수행자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저서로는 ‘조용한 행복’, ‘나라고 불리어지는 것에 대한 알아차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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