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광명사 주지 목종스님.

이 법문은 2017년 1월 20일 대광명사에서 열린 부산 로스쿨 모임 신년법회에서 대광명사 주지 목종스님께서 설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내가 필요로 하면 누가 하지 말라고 해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나 자신이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게 우리 삶의 모습입니다. 매 순간순간 ‘이 순간에 어떤 것을 선택해서 어떻게 실천해야 나의 삶에 도움이 될까?’라는 명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선택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불교는 왜 필요한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불교를 다른 종교처럼 신으로 생각하여 의지하기보다는 부처님을 스승과 같은 존재로 여긴다고 합니다. 그들은 불교공부가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라 여기기 때문에 불교를 필요하다 말합니다. 그렇다면 사회의 법法을 공부하는 여러분은 법과 불교 중 한 가지만 택하라고 할 때 무엇을 택하시겠습니까? 현실적으로 생각해본다면 일반 사회의 법이 불교보다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법학을 공부하는 이유도 현실적인 생활을 해 나가는 데 있어 불교보다 법학을 공부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법학을 공부해야 하고,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해야 하며, 왜 그 길을 가려고 하나요? 보통의 학생들은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의식주는 왜 해결하려고 합니까? 의식주를 해결하면 행복해질까요? 여러분은 자신에게 이러한 근본적인 물음을 끊임없이 던져야 합니다.

이것은 나에게 필요하다

앞서 말한 우리가 하는 모든 선택은 ‘이것이 나에게 필요하다’고 여겨서 하는 선택입니다. 이는 우리 인생에서 매 순간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필요하다’는 것은 ‘나에게 지금보다 더 나은 행복을 줄 것이다. 줄 가능성이 있다’라는 겁니다. 그게 우리가 하는 선택의 기준입니다. 누구도 이 선택에 있어서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만약 불교가 더 많은 행복을 준다면 여러분은 불교를 선택할 겁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내가 알고 있고 보고 있고 느끼고 있는 것, 내 삶의 상황에서 내가 하고자 하는 직업이 내게 행복을 더 줄 거라고 여깁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선택하는 목적이 더 나은 행복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행복은 무엇인가요? 모든 생명체는 더 나은 행복을 위해서 매 순간 선택하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토록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행복이 제대로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물론 사람마다 생각하는 행복에 대한 정의는 다양합니다. 행복은 내면의 평화이기도 하고, 기분 좋은 감정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을 불교적 측면에서 볼 때 각자가 보는 눈이 정답입니다. 그것을 근기라고 합니다. 그가 보고 듣고 느끼는 그대로가 정답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차 한잔이 주는 행복

여러분이 말한 행복의 정의를 통합해본다면 첫째, 마음 편안한 것이고 둘째, 내가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원하는 것을 성취했을 때 그 '성취'를 통해 행복감을 느낍니다. 그런 감정을 행복감 또는 만족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행복을 정의할 때 ‘보다 편안하고 즐거운 상태’ 이 두 가지 모습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편안한 것은 고통에서 벗어난 상태이고 즐겁다는 것은 더 나은 것을 성취했을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차 한잔하는 것은 말 그대로 편안한 상태이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는 편안함과 맛있는 커피로 인해 맛에 대한 즐거움을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는 공부를 마친 후에 직장을 얻어 일하게 된다면 지금보다 더 편안하고 즐거운 상태가 되리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사는 데 있어서 행복은 아주 사소한 곳에 있습니다. 여러분을 즐겁게 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은 큰 목표를 성취해서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오래간만에 멀리 사는 친구의 전화가 오면 그게 내게 행복을 줍니다. 항상 바쁘다가 시간 내서 커피 한잔하면 그 여유가 내게 행복을 주지요. 알고 보면 행복은 아주 사소한 곳에 있습니다. 그 사소한 행복이 내가 성취하고자 하는 욕망을 따지면 오히려 줄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이 삶 속에서 얻어가는 것들은 정작 행복을 얻기보다는 행복을 줄 거라고 여기지는 가능성을 쫓아다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고 자꾸만 무언가를 성취하려고 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행복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한 것은 우리의 삶의 목적이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행복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고 행복을 줄 거라고 여기는 조건에만 매몰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눈을 감고 자신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를 떠올려 보라고 물으면 대게는 현재가 아닌 과거의 어느 때를 이야기합니다. 어르신들은 초등학교에 다녔던 때를 회상하고, 엄마들은 첫 아이를 낳았을 때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단 한 번이라도 불행이나 고통을 위해서 산 적 있나요? 매 순간 행복을 위해 살지 않았던가요? 그렇게 노력하며 산 지 숱한 세월이 흘렀는데 과거가 아닌 현재에 더 행복해야 하지 않나요? 여러분도 공부를 열흘 한 것보다 백일동안 한 것이 더 낫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결혼한 지 20년 후 보다 결혼 첫날이 더 행복하다고 말하는 걸까요? 현재가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는 것은 그간 행복의 조건은 계속 커졌는데 막상 그 조건에는 행복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행복을 줄 거라고 여기는 조건들만을 끊임없이 탐색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내게 있는 것

새로운 것을 원하지 말고 지금 내게 와 있는 것들을 원하는 마음으로 바꾸어 놓으면 나는 매일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욕심을 버리면 행복해지는 이치와 같습니다. 욕심을 버린다는 것을 새로운 무언가를 귀히 여기는 게 아니라 지금 내게 있는 것에 만족하는 겁니다. 욕심을 줄이면 줄일수록 행복하고 그 욕심마저도 내려놓으면 더 행복해지는 겁니다. 이는 더는 원하고 구할 게 없다는 뜻이지요. 그럼 지금 이 순간 완전해질 수 있다는 겁니다. 더는 구하지 않을 때 우리는 더 쉽게 자주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구하지 않는 것이 완전한 행복입니다. 그래서 열반을 욕망이 모두 소진된 상태라고 합니다. 열반의 마음의 상태인 니르바나를 분석하면 '욕망이 모두 소진된 상태, 원하는 게 하나도 없는 상태'라고 합니다. 그 열반의 상태로 가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추어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겁니다. 어떠한 조건을 부정적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정적으로 여기지 않는 데에는 끊임없는 소통과 하심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내 주장만 고집하지 않는 것이 부정적인 마음을 긍정화시키는 훈련입니다. 둘째, 욕심을 버리기 위해서는 내가 원하는 것들을 갖기보다는 그것을 원하는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는 겁니다. 이를 선행이라 합니다. 선행은 행복을 다른 이에게 주는 겁니다. 욕심이 줄면 내가 행복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가 선행을 하라고 합니다. 선행의 당사자가 어떤 이상향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나 자신도 행복을 얻게 되는 아주 쉽고 빠른 길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어떻게 하면 하나도 구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내가 보고 듣고 하는 대상들이 행복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행복은 내가 결정한다는 이치를 아는 겁니다.

오직 나의 근본이 되는 진정한 나의 성품, 자성과 참나 만이 실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진여 자성을 깨달아야 내 안에 존재하는 진정한 행복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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