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출간하고 난 후로부터 독자들을 위해 저자 사인을 할 기회가 많아졌다. 사인만 하기는 허전하고 민망하여 무언가 의미 있고 도움 되는 글귀를 적어주기로 했다. 이 책 저 책을 살펴보고 이 생각 저 생각을 들추면서 책을 받는 분에게 필요할 것 같은 글귀를 적어드렸다. 처음에는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고 받는 분도 좋아하시는 것 같아 보람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글귀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아무리 노력해도 그 분에게 딱 맞는 말을 해 줄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좋은 문구 하나가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의 고정된 문구를 적어 드려야겠다고 마음먹고 처음 생각해낸 문구는 ‘날마다 좋은 날 되소서’ 였다. 오늘 하루도 좋고 앞으로도 매일 매일 좋은 일들만 가득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렇게 글귀를 쓰다가 어느날 불연 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좋은 날이란 어떤 날 일까?’ 좋은 날의 기준은 각자가 다르고 때때로 바뀔 수 있지만, 그 좋은 날을 겪을 때의 마음을 생각해 보니 편하고 걱정이 없는 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늘 평안하고 여여하소서’라는 문구로 대체하기 시작했다. 문구를 받으시는 분도 좋아하는 것 같았고 그 글귀는 쓰는 필자도 보람찼다.

이 글귀를 선정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평안함과 여여함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중국 선종의 초조 달마 대사가 2조 혜가 대사에게 전한 가르침을 안심법문(安心法問)이라 한다. 달마 스님은 번뇌에 휩싸인 혜가 스님의 불안한 마음을 지켜보라고 했고, 그렇게 했더니 이내 마음이 편해졌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여기에서 평안함의 단서를 가져왔다.

깨달음의 세계에서도 마음의 편안함이 중요하듯이 우리의 일상의 삶도 맘이 편하고 걱정이 없어야 좋은 날이고 최고의 삶일 것이다. 과연 그 보다 더 좋은 날이 있을까? 아무리 좋아하는 것을 많이 갖고 큰 성취를 이루었어도 마음이 불안하고 늘 근심 걱정이 가득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런 마음에서는 늘 지옥에서 살고 있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달마 대사의 가르침처럼 마음을 지켜봤더니 편안해지는 도리를 ‘여실지견(如實知見, 있는 그대로 알고 봄)’이라고 한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주시한다는 의미다. 즉, 있는 그대로를 봤더니 허상은 사라지고 실상만이 그득 차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곧, 여여(如如)하다는 의미이며 고통이 소멸된 평안한 상태다. 여실지견을 통해 실현되는 평화로운 마음이 곧 여여함이다. 이러한 상태는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꾸준한 수행 정진과 깨달음이 동반되어야 한다.

고통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근심걱정과 번뇌가 사라진 해탈과 열반의 상태와 다름없다. 삶의 소소한 것에서 작은 여여로움을 발견했다면 그것을 소홀히 하고 하찮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그 작은 것으로 인한 좁은 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한 줄기 빛이 온 전체를 밝게 한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이처럼 작지만 진실한 평화를 발견하면 그것에 감사하면서 계속 관심을 갖고 가꾸어야 한다. 그러면 삶 전체로 확대되고 나뿐 아니라 온 세상과 인류를 밝게 비추는 등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삶의 작은 요소에서부터 여실지견을 실천하여 내 안의 참된 평화와 여여로움을 맛보며 진실된 삶을 살아가면 좋겠다.

 

도연스님은

카이스트 스님으로 알려진 도연스님은 카이스트에 입학해 전자공학을 공부하다 돌연 출가의 뜻을 품고 스님이 되었다. 이후 카이스트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등에서 에너지 명상과 참선을 지도했으며, 2015년에는 카이스트 기술경영학과를 10년만에 졸업 하고 오대산 월정사에서 원명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2016년 사미계를 수지하고, 현재 서울 강남 봉은사에서 어린이, 대학생, 청년부 지도법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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