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한국의 대학에 적을 두고 있는 친구와 그의 제자들이 교토를 들렀다. 그 친구를 비롯한 일행이 시를 쓰거나 예술을 하면서도 철학을 연구하는 철학도이기도 하여 다른 관광명소는 제쳐두고 ‘철학의 길(哲学の道)’을 들러 고쇼(御所=왕궁) 맞은 편에 있는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学) 구내에 ‘윤동주 시비’를 보러 갔다.

윤동주 시비가 있는 도시샤 대학

타 대학에 강의를 가거나 할 경우 지하철로 동지사대학 앞 이마데가와 역(今出川駅)에서 내려 자주 들렀다가 오는 곳이기도 했지만, 이번엔 한 반년 만엔가 가는 걸음이라 기분이 새로웠다. 교문을 들어서 대학 구내를 걸어 들어가면 1867년에 당시 일본왕실의 영어학교로 시작했다는 이 대학의 역사를 말해주듯 빨간 벽돌건물에 등나무가 뒤 덮힌 교사가 이어진다. 예전에 채플 수업과 예배를 했다던 건물 옆에 작은 연못이 자리하고 그 연못가에 윤동주의 시비가 묵묵히 서있다. 시비엔 윤동주 시인의 자필원고 ‘서시(序詩)’가 한글로 각인이 되어있고 그 옆에 일본어 번역이 적혀 있다.

윤동주 시비

우리 일행이 시비에 도착했을 때 시비 주변의 벤치에는 학생들 몇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여학생 둘이 시비에 하얀 와시(일본의 문종이)를 덮어 씌우고 있었다. 비문에 적힌 서시를 탁본을 뜨고 있는 모양이었다. 미대생일까 꽤나 전문적인 도구로 본격적인(?) 탁본을 뜨고 있었는데 시비를 보고자 했던 우리들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주위엔 무궁화 꽃이 보기 좋게 피어 있었고 시비 주변을 둘러싼 작은 연못엔 이스라엘잉어가 보기 좋게 놀고 있었다. 시비 앞의 벤치에 앉아 수 십 분이나 기다렸다. 그러나 좀처럼 탁본작업이 끝나질 않아 한걸음 다가서서 이 시비의 시인이 무얼하는 사람이냐고 학생들에게 물어 보았다. 두 사람 다 이것이 누구의 시비인지 모른다고 했다. 그냥 교내에 시비가 있어 탁본을 뜨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본국내에서 시인 윤동주에 대한 소개가 이 시비가 세워진 1995년을 전후로 본격적으로 재조명을 하여 왔으므로 당연히 모교의 후배들도 상식적으로 알고 있으리라는 예상을 뒤집어 버린 순간이기도 했다.

결국, 30여분을 벤치에서 보내고 탁본중인 시비를 뒤로하고 동지사대학을 나왔다. 돌아오는 길에 시인의 여름방학 귀향길에 체포를 하였다던 시모가모 경찰서와 그 후 실형선고의 재판이 있었던 교토지방재판소를 지나서 왔다. 저녁 무렵 옛 시인을 그리는 우리의 마음만큼이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었고 마침내는 빗방울이 세차게 떨어지고 있었다.

유년시절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민음사 출간)와의 만남으로 인하여 문학의 언저리를 헤매기도 했던 기억이 떠오르기도 한다. 아직도 내 맘 속엔 28세의 윤동주 시인으로 그가 헤었던 별 하나 하나의 청초함만큼 그의 모든 시들이 또박또박 내 머릿속에서 반짝이고 있다. 다만, 순수하게 시대의 서정을 읊었던 그의 문학세계가 일제의 희생으로 숨졌다는 이유 때문에 저항시인 내지는 민족시인으로 다소 정치적으로 평가되는 점은 못내 씁쓸한 여운을 내게 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짧은 생애가 그의 주옥같은 시들을 더욱더 빛나게 해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참고로, 시인 윤동주의 시비는 그의 모교인 북간도의 용정중학교 교정, 연세대학 교정, 독립기념관 공원에도 세워져 있다. 또한 1990년대 후반부터 도시샤대학 출신인 정지용 시인의 시비가 건립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가모가와(鴨川)와 다카노가와(高野川)가 합류되는 시모가모신사(下鴨神社) 아래쪽 언덕에 들어설 거라고 했지만 결국 2005년 윤동주 시비의 오른쪽에 나란히 세워져 있다.

 

 

 

송휘영 교수(영남대학교 독도연구소 연구교수)는

농업경제학박사(日本 京都大), 동아시아국제정치학회 부회장, 한국일본문화학회 부회장,  동북아역사재단, 국립중앙과학관, 독도재단 등 자문위원, 환경법률신문 논설위원, 전) 한국그린투어리즘연구소 소장, 전) 농식품신유통연구원 연구위원, 전) 일본 교토대학 객원연구원. 저서로는 '일본 향토사료 속의 독도(2014, 선인)' 외 20여 권이 있으며, 여러 매체에 독도에 관련된 칼럼을 게재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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