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가 물을 마시면 우유가 되고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이 된다는 말이 있다. 스님이면 다 스님이고 신도면 다 신도인가? 우리 스스로 자문해 봐야한다. 수행에 앞서 우선 인성이라든지 사상, 의식이 바로서야 스님이요, 신도다. 우선 불교도는 이런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고3이 집에서 제일 높다고 하는 말이 있다. 절에서는 선방 스님들이 높다. 부모님이 생계를 유지하며 자기 뒷바라지 하느라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절 살림 사는 소임자 스님들이 수고가 많다는 것을 살필 줄도 모르면서 대학을 가고 선불장(選佛場)에서 부처로 뽑혀봐야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물론 일찍 사람이 된 사람[僧]들은 언제 어디에 내 놓아도 문제가 없고 죽어라 공부하지 않아도 마음 씀이 다르다. 그래서 선근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대만의 어느 절에 가서 본 승찬승(僧讚僧)은 스님이 스님을 칭찬한다는 말인데, 수행하는 스님들이 행정하는 스님들을 칭찬하고 행정하는 스님들이 수행하는 스님들을 칭찬하면 신도가 스님을 칭찬하고, 스님이 신도를 칭찬하게 되면서 수행의 반은 먹고 들어간다.

승중적법중하고 승경적법경(僧重則法重 僧輕則法輕)이라고 신도님들이 스님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그 스님이 하는 법문인들 무슨 가치가 있는가? 이러한 마음가짐은 번뇌를 뿌리 채 뽑는 제초 작업이다. 화두 들고 들숨 날숨 챙기고 염불만한다고 수행이 다 되는 것은 아니다.

거두어지는 자는 중생이요 거두는 자는 보살이라고 한다. 보살은 수행자다. 나는 거두어 지는 자인가 누군가를 거두어 주는 사람인가? 절에다 손해를 끼치는 중생인가 절에다 이익을 주는 보살인가? 국민의 4대 의무를 다해서 나라를 돕는 사람인가? 사사건건 자기 주권만 내세우며 나라에 뭘 해달라고만 하는 사람인가? 커다란 원력을 세워서 어려운 이를 돕는 사람들은 승속을 막론하고 훌륭한 수행자 보살이라고 할 수 있다.

염불, 참선, 간경 그 어떤 수행을 택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사리도 모르고 거두어 주려는 마음이 없으면 백날 하청 이라, 절에 아무리 오래 다녀 봐도 시쳇말로 별 볼일 없는 것이다.

살인마 앙굴리마라가 그렇게 흉악한 사람이지만 붓다께서는 그를 믿어 줌으로서 앙굴리마라는 아라한과를 성취할 수 있었다. 서로 불신하면서 어떻게 절집이라 하며 화합승가라 할 수 있겠는가? 너를 믿지 못하겠으니 우리가 하겠다는 것은 서로의 역할을 무너뜨리는 잘못된 발상이다. 수행한다는 사람들은 선불장에서 부처가 되겠다고 공부하는 수험생이다. 고3이 뒷바라지하는 부모를 고맙게 생각하듯이 절에서는 외호해 주는 소임자들의 입장을 역지사지로 살필 줄 알아야 미래가 있는 수행자라 할 수 있다.

서로 칭찬 하고 믿어주는 데서 도심(道心)이 쑥쑥 자란다. 참선을 한다. 염불을 한다. 간경을 한다. 절을 한다. 봉사를 한다. 그 무엇을 하더라도 이런 근본이 되어 있지 않으면 백날 해도 소용이 없다. 절에 오래 다니면 뭣하고 먼저 스님이 되어본들 마음 씀씀이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도무지 소용이 없는 것이다.

돈 버는 자랑하지 말고 쓰는 자랑하라고 했듯이 마음을 잘 쓰는 것이 중요하다. 견해 자체가 이타적이어야 다른 사람에게도 이롭고 나도 이롭기 때문이다.

내가 어느 절 선방에서 살 때 주지스님이 얼마나 바쁘게 사시는지 고맙고 안쓰러워서 주지스님 칭찬을 좀 했더니 함께 정진 하던 스님이 이렇게 말했다. “다 반사이익이 있으니까 그러지 뭐 우리를 위해서 그러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참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그렇지요, 주지하기 참 어렵겠네요“라고 말해줬더라면 오직 좋겠는가만은 그렇게 박하게 하더니 한참 살 나이에 그는 이미 죽고 없다. 그렇다고 대중을 외호하고 가람을 수호하며 포교하는 스님들이 다 과연 승가 정신을 가지고 공심으로 대중스님을 섬기며 절 살림을 사는지는, 스스로 생각해 보면 너무나 잘 알 것이다.

저마다의 양심에 비추어 사리사욕을 챙기고 있다면 옷 벗고 나가서 손수레 끌며 채소 장사를 하는 것이 한층 떳떳할 것이다. 출가부는 시군자소소(出家富 是君者所笑) 라고 승가는 부자라야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지만 수행자는 가난해야 한다. 안 그러면 뜻있는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다는 말이다. 평대중과 주지스님 간에 갑을 관계를 만든다면 세간이지 절은 아니다. 회색 옷은 유니폼이지 신선한 승복은 아닌 것이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고 의식 없는 몇몇 성직자들이 있지만, 다수의 분들은 원력으로 헌신하며 수고하시는 고마운 스님들이 많다.

이상 수행 환경과 분위기라는 외연도 중요하기 때문에 수행이전의 온전한 생각을 언급해 보았다. 정신이 깨어 있고 영혼이 살아 있는 사람이 불자가 되어야 한다. 물론 절에 다니면서 올바른 정법을 배우면 그렇게 된다.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렵고 불법 만나기 어렵고 정법 만나기 어렵다고 한다. 요즈음 불교 신도가 줄어 든다고 걱정하고 있지만 하나도 걱정할 일이 아니다. 군대에 재래 무기만 잔뜩 있으면 무엇하겠는가? 첨단화된 무기와 적지만 정예화 된 병정들이 중요하다. 인격 수행은 안하고 기복 일변도로 불교의 격을 떨어뜨리는 승속은 반성이 필요하다. 온전한 기와가 깨어진 옥보다 낫다는 말을 새겨야 하는 이유다.

 

* 이 내용은 3월 12일 도현스님께서 연암토굴에서 불자들에게 설하신 법문을 정리한 것입니다. 법문은 다음에 계속 이어집니다

                                                          

도현 스님은
범어사 덕명 스님을 은사로 1963년 부산 범어사에서 입산 출가했다. 1965년 동산 스님에게 사미계를, 1972년 범어사에서 석암 스님에게 비구계를 받았다. 제방선원에서 30여년간 정진했으며 태국에서 5년 동안 위빠사나 수행을 체득한 스님은 현재 지리산 연암 토굴에서 홀로 수행자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저서로는 ‘조용한 행복’, ‘나라고 불리어지는 것에 대한 알아차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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