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동래포교당 법륜사.
범어사 동래포교당의 역사는 벌써 100년을 넘어섰다. 1910년, 산중불교의 한계에서 벗어나 전법과 포교의 전진기지 필요성을 자각한 스님들이 뜻을 모았다. 이후 포교당은 신도들에게 스님들의 법문을 청할 수 있는 도량이자 포교라는 본연의 역할에 가장 충실했다. 그뿐만 아니었다. 독립투사들에게는 항일운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3.1운동의 모의 장소로 학생들은 법당에 모여 일제에 저항하며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선언서를 숨겨 두기도 했다.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동래포교당은 구법의 장이자 항일의 현장이었다. 다만 변하지 않은 것은 도심 불자들을 향한 포교의 통로였다는 점이다. 동래포교당은 이후 인근 학소대로 옮겨지며 현재의 법륜사라는 사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 학의 둥지 위에
  • 천진불 웃음소리 자라다

선래 스님은 은사이신 동산 큰스님을 모시고 종단의 여러 직책을 거쳤다. 1981년, 법륜사 주지로 부임해 포교라는 새로운 임무를 떠안은 스님은 큰 고민 없이 어린이 포교에 뜻을 두었다. “신도가 말하기를 ‘스님, 애들이 유치원에 가서 뭘 배우는지 아멘아멘 이럽니다.’라고 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가만히 보니까 불교 유치원이 하나도 없어서 그런가 싶더라고. 망설일 이유 없이 바로 불교 유치원 건립 불사를 시작했지.” 불과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법륜유치원이 완공됐다. 불교 최초의 유치원이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법륜유치원 전경.
천진불의 밝은 표정.

“벌써 33회 졸업생이 나왔으니까, 초기에 졸업한 애들이 어느덧 엄마가 되어 아이 손잡고 유치원에 온다고. 그걸 보고 있으면 참 재미나고 기분이 좋지.” 사실 법륜사의 인재 불사는 근래의 인연이 아니다. 1921년 동래포교당이 경영한 싯달야학교는 지역의 아동 교육에 앞장서며 교실을 신축할 정도로 야학을 확대시켰다. 이후 야학교가 사라지고 꽤 오랜 기간 어린이법회가 유지되었다. 포교의 시작이 인재 불사임을 실천해 온 것이었다. 그 인연의 고리와 선래 스님의 원력이 만나 법륜유치원은 ‘줄서야 들어가는’ 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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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람에서 무덤까지
  • 사회복지의 이상에 맞닿은 불교

 

법륜사의 삼층석탑과 대웅전.

스님이 주지 소임을 맡은 지 16년, 12평 남짓한 법당을 시작으로 하여 대웅전, 학소대, 삼층석탑, 천왕문…. 오늘날 규모 있는 가람을 일구기까지 주지로서의 소임에 어긋남 없이 충실했다. 젊은 시절 선방에 들어가고 싶어 하룻밤 만에 초발심자경문을 마쳤다는 일화는 스님의 성정을 그대로 보여 준다. 그 후 도리사와 불국사 등 제방 선원에서 20안거를 성만할 정도로 스님은 공부인으로서의 삶에도 충실했다. “주지를 16년 하다 보니까 내가 너무 주지 직에만 얽매이고 있진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 사회를 위해 무언가를 회향해야 하지 않겠나, 대사회적인 일을 해야겠구나 싶어서 주지 직을 내려놨지.” 스님은 주저 없이 사회복지법인을 설립했고 무료노인요양시설인 무량수요양원을 건립했다.

무량수요양원 전경.

“무량수無量壽는 한량없는 수명이라는 뜻이고, 아미타 부처님이야. 연고도 없고 가족도 없는 사람은 어떻게 여생을 회향하겠나. 그런 분들을 모시고 아미타 부처님 곁에서 편안하게 여생을 마무리하실 수 있게끔 하는 것이지.”

‘요람에서 무덤까지’ 사람의 일생을 표현하며 우리가 아주 흔히 쓰는 말이다. 이 말을 처음 쓴 사람은 1942년 영국의 경제학자 윌리엄 베버리지다. 그는 이 표현을 사회보장제도가 국민의 일생 전부를 포괄해야 한다는 의미로 주창했다. 그리고 현대 사회복지제도의 근간이 되고 있다. 스님이 구현하고자 했던 불교복지의 모습이다. 어린이 포교에서부터 노인 복지까지. 소임을 맡으며 처음 시작했던 유치원, 그리고 주지 직을 내려놓으며 시작했던 요양원 건립은 스님의 가장 아름다운 회향의 모습이었다.

 

  • 예불은 자기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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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사 주지 선래스님

스님께 스승과의 일화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1958년 동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지 벌써 60년이 다 되어 간다. 깨끗하게 정리된 사진첩 속에는 스승의 흔적이 정갈하게 담겨 있다. 따로 펜으로 적어 둔 것도 아닌데 사진 한 장을 두고 스님의 설명은 길게 이어진다. “스님께서 종단에서 큰일을 하실 때 부산과 서울을 자주 오갔지. 그땐 서울까지 가는 데 한나절, 오는 데 한나절이었어. 전화도 없던 시절인데 부산역에 도착해서 차를 타고 범어사에 올라가면 어산교 앞에서 내리거든. 그러면 어산교부터 대웅전까지 스님들이 길게 줄을 서서 동산 스님을 모시러 나온다고. 사미부터 시작해서 사중의 모든 스님들, 그리고 암자의 스님들까지 마중 나와. 나는 스님의 걸망을 들고 뒤따라 들어가는데 괜히 으쓱해지곤 했지.” 스님은 웃으며 옛 소회를 들려 줬다. 하지만 그저 웃자고 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땐 그렇게 스승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신심이 있었어. 믿고 따르니까 대중들 모두가 자기 마음을 내어 모시러 나오는 거지. 그게 참 생각이 많이 나. 그때의 은사 스님은 부처님이고 신심을 일으키는 대단한 분이셨어.”

믿음이 기억을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스승과의 일화는 바로 어제 이야기처럼 선명하다.

“1976년에 세계불교도의회 사무총장 자격으로 네팔에 간 적이 있는데, 그 기회에 인도 성지순례를 갔어. 그때는 지금처럼 관광객도 많이 없던 시절인데, 기억이 아직도 선명해. ‘하찮은 내가 부처님이 걸었던 길을 걷고 있다. 내가 밟고 있는 흙길도 부처님이 다 걸으셨던 길이다.’라는 생각을 하니 큰 감동이었지.”

스님의 길도 마찬가지이리라. 부처님 탄생과 입멸의 성지를 걸었을 그 두 발이 불교 복지에 사라지지 않을 족적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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