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동안거 결제입니다. 여름에 하안거, 겨울에 동안거 1년에 두 번의 결제는 10년이면 20번이 됩니다. 해제 때는 산문 밖을 돌아다니고, 해제 때 느낀바가 있으면 결제 때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다짐을 세웁니다. 또 결제 때 느꼈던 것을 해제 때 돌아다니면서 다시 깊이 다짐 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靜이라 일상 속에 가기도 하고 머무르기도 하고, 말할 때도 있고 입을 다물 때도 있어 그러한 움직임 가운데 조용한 자기를 봅니다.

어제부터 공부를 시작한 사람도 있고 십년, 이십년씩 공부를 한 사람도 있습니다. 십년, 이십년 전에는 내 몸이 형편없었는데 몸과 마음을 닦다보니 몸이 좋아지고, 어리석은 마음이 사라진 겁니다. 명실공히 몸과 마음이 단정히 좌복 위에 앉아있다 말입니다. 구부러진 몸을 자꾸 조절하고, 가지런히 있도록 하면 삐뚤어진 것 없는 몸이 됩니다. 또 적정하게 움직이고 쉬어주면 굳었던 몸이 풀어지고 몸의 부작용도 사라집니다. 일상 생활 자체가 모두 좋아지게 되는 겁니다. 몸이 건강하지 않으면 무엇을 보는 것도 싫고 듣기도 싫어집니다. 그러면 산다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워 집니다. 또 마음을 떠나서 몸이 있을 수 없고 몸을 떠나서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죽으면 육신과 이별하지만, 지금은 육신 속에 나의 몸이 있습니다. 몸 자체를 조용히 생각하고 마음을 닦고 몸을 닦으면 몸에 표시가 납니다.

육신은 형태가 있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있지만 마음은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마음을 육신 보듯이 만져볼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입니다. 옛날 선사가 생사대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입산수도해서 마음을 깨달아 생사를 초월했습니다. 그러면 마음을 깨닫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우리가 마음을 닦기 위해 산문에 들어왔습니다. 마음 깨닫는 방법은 한 두가지만 있는 게 아닙니다. 잠들지 않고 끝까지 버티고 앉아있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일언지하에 종소리를 듣고 깨닫기도 합니다. 그러면 종소리를 열 번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백 마디 들어도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는 사람도 있습니다.

선사들의 깨달음의 법문을 내용을 보면 어려운 것이 하나 없습니다. 심시불이라, 마음이 부처라 했습니다. 마음이 부처라 하면 마음은 누구입니까? 각자가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마음 안에 부처님이 있다면, 우리 자신이 모두 부처님이라는 뜻이 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는 욕심도 많고, 감정도 많고, 우둔하고 어리석은데 어떻게 내가 부처님이 될 수 있을까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불생불멸의 마음을 갖추고 있는데도 각자가 자기도 모르게 망상과 집착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망상을 탁 털어버리면 그만인 겁니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을 안하면 즉 여여불이라, 수천만년이 되도 변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마음이라고 하는가. 마음은 여러분이 가만히 앉아있을 때 생각을 하고 듣고 있고 보고 있는 그것이 마음입니다. 마음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앉아서 일하면서도 이러쿵저러쿵 소리를 듣고, 온갖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옛날 선사들이 종소리와 목탁소리를 듣고 깨달았다고 하는데 우리가 수없이 듣고도 깨닫지 못한 이유가 바로 이겁니다.

옛날 동산스님께서는 대나무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홀연히 깨달았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무엇을 깨달았습니까?’하는데 “누가 그런 소리 하느냐, 나는 그런 소리 모른다. 남들이 나더러 깨달았다고 하는 것이지 나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합니다. 그저 “소리를 듣고 나를 알았다”하는 겁니다. 그러면 소리를 듣기 전에는 나를 몰랐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중생본래성불이라. 중생이면 누구든지 차가운 것을 찬 줄 알고, 뜨거운 것을 뜨거운 줄 압니다. 근데 우리가 이것을 다 안다고 해서 무시하고, 깨달았다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깨달음을 찾기 위해 밖으로 헤매다 보니 생사윤회에 끄달리게 되는 겁니다. 마음 밖에 도가 없고 마음 밖에 진리가 없고 마음 밖에 부처가 없다는걸 알아야 합니다. 내 자신을 알았다는 것을 도라하고 깨달음이라 하니 곧 부처님이라 하는 겁니다. 그러면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사람은 어떤 차이가 있느냐. 깨달은 사람은 온갖 공부를 하다가 한 생각 돌이켜보니 바깥으로 향해있던 배움이 끊어집니다. 그래서 한가하고 바쁠게 하나 없습니다. 일상생활에 예불할 때 예불하고 울력할 때 운력하고, 더우면 시원하게 하고, 시원하면 따뜻하게 하는 그겁니다. 이렇게 적절하면 마음도 편안하고 몸도 건강합니다.

깨달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물체를 똑같이 보고 소리를 똑같이 들어도 취사분별에 따라 다릅니다. 진리를 구해야겠다라고 생각하고 취사분별에 사로잡혀서 소리를 듣고 물질을 보니까 어떨 때는 기분이 좋고 어떨 때는 기분이 나쁩니다. 깨달은 사람은 이때까지 깨닫지 못한 사람의 심사로 있다가, 모든 생각이 다 끊어지고 종소리를 들으니 종소리 뿐압니다. 거기에 좋고 나쁨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바보 같은 짓을 했구나, 온갖 생각을 품고 있었다 깨닫는 겁니다. 도라는 것은 감정이 아니고 사량분별이 아닙니다. 모든 생각을 초월한 자리인 것입니다. 생각에 사로잡힌 것을 탁 놔버리면 곧 초월입니다. 금강경에 ‘일체 생각을 여읜 자가 제불’이라고 했습니다. 온갖 생각의 감정을 품고 들은 사람에게 종소리가 시원할 리 없습니다. 깨달은 사람에게는 얼마나 시원하고 탁 트인 소리입니까.

우리는 온갖 생각을 하다 보니 사량분별에 가로막혀 귓전에 종소리가 울려도 모르고 있습니다. 분별을 벗어던지면 소리도 진리요, 물체도 진리요, 두두물물이 부처님 아닌 것이 없습니다. 푸른 바다가 그대로 적멸궁이라 그것도 부처님입니다. 백의관세음보살님이 아무런 말이 없고, 남순동자는 아무런 들은 바가 없습니다. 설함 없이 설했고 들음 없이 들었습니다. 법은 들을 수 없고 설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임제선사와 내가 다르지 않고, 여러분과 임제선사가 다르지 않습니다. 분별을 놓고 잘 반조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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