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를 뿌리째 뽑는다는 것은 밖으로 사회참여를 하고 안으로 자기수행을 한다는 것인데 내가 바라는 사회참여란 대승적으로 화엄경의 보현행원품 십대원왕이다. 그걸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우주적 차원에서 이름이 다른 한 송이 꽃들이다. 이 꽃을 피워서 이 세상을 장엄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남이 어떻다고 이야기하지 말고 자기 꽃만 잘 피우면 이 세상을 아름답게 장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사회참여란 대승적으로

화엄경의 보현행원품 십대원왕이다

 

구체적으로 다른 사람의 인격을 존중해 주는 생활 ‘예경제불원’, 다른 사람을 칭찬해 주는 생활 ‘칭찬여래원’, 널리 베푸는 생활 ‘광수공양원’, 매사에 자기 잘못이라 하고 남을 탓하지 않는 생활 ‘참제업장원’, 누구든지 잘되는 걸 좋아하는 생활 ‘수희공덕원’, 부처님 가르침을 널리 전하는 생활 ‘청전법륜원’, 또 좋은 멘토를 만나면 그 사람이 오래 살기를 바라고 섬기는 생활 ‘청불주세원’, 그리고 언제라도 겸손하게 선재동자처럼 배우는 생활 ‘상수불학원’, 역지사지로 늘 다른 사람의 입장을 돌아보며 거두여 주는 생활 ‘항순중생원’, 그다음 자기가 그동안 이룩한 정신적 물질적 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생활 ‘보개회향원’, 이 열 가지가 십대원왕이다. 이 열 가지 강령인 주는 불교를 가지고 우리가 이 세상에 참여해야 한다. 불자는 그렇게 살아야 하며 이것이 대승 불교의 주된 사상, 화엄사상인 것이다.

이제 자기 수행으로 소승적 자기 탐구에 들어간다는 것은 기도, 염불, 화두, 참선, 위빠사나 등이 있지만 저마다의 성향에 따라 여러 가지 방법 중에 택일하면 된다. 나는 위빠사나를 하는데, 위빠사나를 하기 전에 하는 염불을 조금 소개해 보고자 한다. 마치 우리가 불전에 오분향례로 예불을 올리고 나중에 앉아서 좌선 하는 것과 같지만 내용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우리는 계향 정향 해향 해탈향 해탈지견향을 불법승 삼보에게 공양 올리는 형식으로 되어있는 수승한 예불법을 가지고 있는 반면 위빠사나 하는 곳에서는 불법승 삼보에 예경을 올리고 그 다음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상념하고 자비관으로 회향하는 형식이다. 예불을 먼저하고 좌선하는 것은 먼저 지혜를 개발하고 뒤에 삼매를 통해서 더 넓은 통찰지를 체험하고자함이다.

삼보에 대한 예경

아라항 삼마 삼붓토 바가와 붓탕 바가완땅 아비와데미.

모든 번뇌로부터 떠나 스스로 정각을 이룬 존귀하신 붓다 앞에 머리 숙여 절 하나이다.

스왁카또 바가왓따 담모 담망 나맛싸미.

존귀하신 분에 의해서 매우 잘 설해진 진리. 그 담마 앞에 머리 숙여 절 하나이다.

수빠띠빤노 바가와또 사와까상코 상캉 나마미.

존귀하신 분에 의해서 잘 수행된 제자들 그 상가 앞에 머리 숙여 절 하나이다.

(중략)

 

가르침에 대한 상념

마양땅 담망 수뜨와 에왕 차나마, 차띠삐툭카, 차라삐툭카, 마라남삐툭캉, 소까빠리테와툭카, 토마낫수빠야사삐툭카, 압삐애히삼빠요코툭코, 삐애히위빠요코툭코, 얌삐짱 나 라파띠담삐툭캉

우리는 그 가르침을 이와 같이 들어 알고 있습니다. 태어남은 괴로움이요 늙음도 괴로움이며 죽음 또한 괴로움이다. 슬픔과 탄식, 육체적 고통과 마음의 번뇌, 절망과 좌절이 괴로움이요 사랑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며 사랑하는 것들과 헤어지는 것 또한 괴로움이요 바라는 것을 이루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상킷때나 빤쭈빠타낙칸타툭카 새이야티탕 룹뿌빠타나칸토 왜타누빠타낙칸토 산뉴빠나타낙칸토 상카루빠타낙칸토 윈나뉴빠타낙칸토.

또한 육체와 정신에 집착함도 괴로움이다. 즉 몸에 집착하고 느낌에 집착하며 생각에 집착하고 개념에 집착하며 인식에 집착하는 것이다.

애쌍빠린나야타라마노 소 파카와 애왕 파후랑 사와깨 위내띠 에왕파카 쨔 빠낫사 파카와또 사와깨수 아누사사니, 파후라빠왓따띠.

부처님께서는 생존 시에 제자들로 하여금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쌓임에 대한 집착을 덜어 주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거듭 거듭 존재의 자연적 특성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루빵아닛짱 왜타나아닛짜 산야아닛짜 상카라아닛짜 윈냐낭아닛짱.

몸은 변하는 것이며 느낌도 변하고 생각도 변하며 개념도 변하고 인식도 변한다.

루빵 아낟따 왜타나 아낟따 산야 아낟따 상카라 아낟따 윈냐냥 아낟따 샆패 상카라 아닛짜 샆패 담마 아낟따 띠.

몸은 실체가 없는 것이며 느낌도 실체가 없고 생각도 실체가 없으며 개념도 실체가 없고 인식도 실체가 없다. 일체의 물질과 정신 현상은 무상한 것이며 모든 존재는 무아인 것이다.

때마양 오딘남하 차띠야 차라마라내나 소깨히빠리테왜히 툭캐히토마낫새히 우빠야새히 툭코띤나 툭카빠래따.

우리는 모두 태어남, 늙음, 죽음, 빈곤, 슬픔, 비탄, 근심에 둘러싸여 있고 고뇌에 시달리고 있으며 아직 드러나지 않은 괴로움들이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아빼와 나미맛사 깨와랏사 툭카칸탓사 안따끼리야 빤냐애타띠.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이러한 괴로움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우리는 이를 올바르게 인식해야만 한다.

찌라빠리닢푸땀피 땅 파카완땅 사라낭카타 담만짜상칸짜 땃사 파카와또 사사낭 야타사띠 야타파랑 마나시까로마 아누빠디빳차마 사사노빠띠받띠 이맛사 깨와랏사 툭카칸탓사 안따끼리야 상왇따뚜.

우리는 부처님을 비록 열반하신 지 오랜 후에 만났지만 그 가르침과 상가를 우러러 받들며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현상 관찰 수행을 마음에 새기고 실천을 통해서 마음 집중 수련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수행을 통해서 일체 번뇌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자.

 

우리 자신을 돌아봄

차라담몸히 차랑 아나띠또.

우리는 자연스레 늙고 있으며 이를 벗어날 수 없고.

파야티담몸히 파야팅 아나띠또.

우리는 자연스레 병들 수 있으며 이를 벗어날 수 없다.

마라나담몸히 마라낭 아나띠또.

우리는 자연스레 죽게 되어 있어 이를 벗어날 수 없으며.

샆패히 매 삐애히 마나뻬히 나나파오 위나파오.

우리는 소유하는 것들과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벗어나 언젠가는 이별해야만 한다.

깜마사꼼히 깜마타야토 깜마요니 깜마판뚜 깜마빠띠사라노.

이것은 우리가 저마다의 업을 지어 과보로 받는 것이며 또한 새로운 업을 발생시켜 업이 자신을 따르게 하고 업에 얹혀살게 된다.

양 깜망 까릿사미 까라야낭 와 빠빠깡 와 땃사타야토 파윗사미

우리는 우리가 짓는 착한 업이거나 악한 업의 과보를 받아야 할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애왕 암해히 아핀항 빳짜왝키땊팡.

우리 모두는 이와 같은 인과의 법칙을 매일 살피며 정업을 닦읍시다.

 

자비관 요약

우리 모두가 정업을 닦는 공덕으로 나의 가족들과 모든 이웃이 행복하여 지이다.

우리 모두가 정업을 닦는 공덕으로 나의 조상들과 모든 이웃의 조상들이 이고득락하여지이다.

우리 모두가 정업을 닦는 공덕으로 일체중생이 모두 성불하여 지이다.

 

이 내용은 모두 지혜를 개발하는 법문이다. 우리 예불과는 조금 다르지만 우리 예불의 뜻도 참 좋다.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 광명운대 주변법계 공양시방 무량불법승.

헌향진언

옴바라도비야훔(3번)

지심귀명례 삼계도사 사생자부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중략)

 

자비관

유원무진삼보 대자대비수아정례 명훈가피력 원공법계제중생 자타일시성불도

오직 원컨대 다함없는 삼보님께서는 대자대비로 우리들의 정성을 거두어 가피를 드리우사 법계의 모든 중생이 다함께 성불하게 하소서

 

불자의 사회적 참여와 자기 수행은

번뇌를 뿌리째 뽑는 근본이다

 

우리 염불을 깊이 들어가 보면 뜻이 좋다. 계, 정, 혜, 해탈, 해탈지견향. 계戒는 자기 질서를 가지고 자기관리를 잘 하는 것, 정定은 어디서 무슨 일을 하거나 늘 마음이 안정된 상태에서 하는 것, 혜慧는 이런 저런 일을 당해서 판단을 명확히 하는 것, 해탈解脫은 무슨 일을 하거나 근심 걱정 없이 하는 것,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은 그렇게 사는 자기를 남 보듯 보면서 사는 것, 이 다섯 가지를 내가 실천함으로 해서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것이 된다. 부처님께는 돈, 음식 이런 공양도 올리지만 그보다 더 높은 고준한 공양법을 알아서 생활 속에서 잘 사는 것이 사사불공事事佛供에 이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예불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아주 좋은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불자의 사회적 참여와 자기 수행은 번뇌를 뿌리째 뽑는 근본이다. 밖에서 안으로 고쳐가는 것은 십대원왕으로 하고 안에서 밖으로 고쳐 나오는 것은 기도, 염불, 참선, 위빠사나로 하면 된다. 그러면 일상생활을 정성스럽게 차근차근 재미있게 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평생 지속할 수행법 하나를 염두에 두고 늘 깨어 있으면 정진력이 더해져서 번뇌가 쑥 둘러빠지는 그날이 온다. 이 얼마나 희망적인 순간순간인가?

근본적 괴로움의 뿌리를 뽑는 수행법에 들어서기 전에 예비적으로 좀 해두는 이런 저런 이야기들은 팔정도에서 말하는 정견을 바로 세우기 위함이라 한두 번 더 반복해야 한다. 정견이란 바른 세계관 인생관을 정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 수행하는 사람에겐 생각하는 철학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멍청한 사람에게 “도대체 생각이 있는 사람인가? 없는 사람인가?”묻는다. 불자는 바른 생각이 먼저 서야 온전한 수행을 하는, 신심 있는 부처님 제자라 할 수 있다.

 

* 이 내용은 2월 12일 도현스님께서 연암토굴에서 불자들에게 설하신 법문을 정리한 것입니다. 법문은 다음에 계속 이어집니다.

                                                          

도현 스님은
범어사 덕명 스님을 은사로 1963년 부산 범어사에서 입산 출가했다. 1965년 동산 스님에게 사미계를, 1972년 범어사에서 석암 스님에게 비구계를 받았다. 제방선원에서 30여년간 정진했으며 태국에서 5년 동안 위빠사나 수행을 체득한 스님은 현재 지리산 연암 토굴에서 홀로 수행자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저서로는 ‘조용한 행복’, ‘나라고 불리어지는 것에 대한 알아차림’ 등이 있다.

저작권자 © e붓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