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총림 방장 지유 대종사.

제가 이 자리에 앉아서 결제 날, 혹은 해제 날이나 반 산림 때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여러분은 아십니까? 여러분은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남의 속을 알 수 없으니 결국은 우리가 입을 통해서 무슨 말을 하는지 그 소리를 귀로 듣고 마음속에서 그 뜻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초발심이란 처음 마음을 발하는 때입니다. 그래서 두 번, 세 번째 마음을 내는 것과는 다릅니다. 첫 번째 마음 발할 때가 바로 변정각(便正覺)이라 하며 이것을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염불하고 참선하고 기도를 하고 화두를 들더라도 가장 급선무로 알아야 하는 것은 마음입니다. 마음을 알지 못하고 도를 닦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깨달음에 이르지 못합니다. 우리가 밤에 잠을 자지 않고 공부를 해도 효과가 없습니다. 그것은 마음을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도대체 무엇을 마음이라고 하는가 알아야 합니다. 화두를 든다는 것은 화두를 의심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의심 하는 것은 다시 의심하지 않도록 믿기 위해서 의심을 하는 겁니다. 의심이 깨져버리면 ‘아, 믿음이 바로 이것이로구나.’ 하며 거기에서 다시 의심이 일어나지 않는 겁니다. ‘미심수도 종무이익迷心修道 終無利益’이라 미혹한 마음으로 도를 닦은들 끝내 아무런 이익이 없다는 말입니다.

옛날에 어떤 선사가 자기 마음을 깨닫고자 아무리 연구를 해도 깨닫지 못하고, 불법을 터득하려고 해도 터득하지 못해 기진맥진했습니다. 그 이상 나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궁지에 몰렸을 때 갑자기 어디선가 종소리를 울렸습니다. 이때 선사가 깨달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깨달은 입장에서 보면 자기는 종소리를 듣고 알아차린 겁니다. 허나 알아차리지 못한 모든 사람들도 그 사람과 똑같이 종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종소리는 있다가도 사라지지만 나는 종소리가 났다고 해서 새로 생기거나 종소리가 사라졌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어떻게 해야 나를 깨닫는지 온갖 화두를 듭니다. 결국에는 종소리 듣고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옛 동산 스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대나무 밭을 지나다 대나무끼리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깨달았다는 겁니다.

이 법회에서 목탁 소리를 듣고 법문을 듣는데, 듣고 있는 이는 내 자신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니 종소리를 듣고 자기를 알아보라는 겁니다. 자기를 알아차리기 전에도 종소리는 그대로 종소리입니다. 별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살아가는 대로 보고 듣고 움직여야 합니다. 세속의 사람들이 일하고 노동하는 것은 먹고 살기 위해서 돈을 버는 행위입니다. 명예, 권력을 얻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을 하고 싸움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불가의 승려들도 아침에 일어나 예불하고 염불하고 청소도 하고 공양도 하고 밭일도 하며 항상 움직이고 있습니다. 승려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은 돈이나 명예를 얻기 위함이 아닙니다. 세속의 사람이나 불가의 승려들이나 움직이는 모습은 똑같지만 내용은 다릅니다. 승려는 조용히 좌선하고 있을 때나 빗자루 들고 청소하고 있을 때, 찻잔을 들고 차를 마실 때 움직이고 있습니다. 자기 속에 가지고 있는 모든 욕심과 감정, 산란한 생각을 움직임의 동작을 통해서 쓸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상생활에서 예불도 하고 몸으로 움직이는 소리를 듣고 혼침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속에 누적되고 있는 번뇌와 산란, 고통과 괴로움 같은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버리고 마음을 닦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세속적인 명예와 권력을 갖추어도 이 몸은 한 시간, 하루, 한 달, 일 년, 이 년, 십 년이 흐르고 나면 생로병사에 가로막힙니다. 아무리 단 것을 먹고 이 몸에 애착하여 길러봐야 몸은 틀림없이 허물어집니다. 좋은 옷으로 몸을 감싸고 보호해봐야 이 몸은 언젠가 사라지고 맙니다. 이 몸이 사라지기 전에 몸속에서 느끼고 있는 이 마음을 닦아야 합니다. 마음을 닦는다는 것은 우리가 쓸데없는 생각으로 일으키는 감정, 모든 산란한 마음에 사로잡혀있는 물체를 조용히 앉혀 보는 겁니다. 물체가 내 눈에 들어오게 하려면 쓸데없는 생각을 다 털어버려야 합니다. 어떤 생각에도 사로잡히지 말라 했습니다. 모든 생각을 다 털어버리면 현실인 이 자리에 돌아옵니다. 마음을 비우라는 말은 마음을 ‘두고 보라’는 말입니다. 모든 물체 물체마다 그것이 진리요, 도라는 말이 바로 이 소리인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자기 마음을 가지고 자기 마음을 찾는 사람은 ‘행주좌와行住坐臥’ 조용히 마음속에 가진 것을 털어버리고 현실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 마음으로 일상생활에서 예불도 하고 공양도 하고 청소도 하고 온갖 사람을 상대하고 있는 겁니다.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이 바로 수행의 도량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철저하고 의심 없이 확인해야 합니다. 목탁 소리 듣고 깨달았다는 것은 자기를 깨달았다는 겁니다. 남을 깨우친 것이 아닙니다. 옛날 경우 선사도 모든 학인을 다 쫓아버리고는 내가 문자만 알고 실제 불법을 몰랐다고 말하며 화두를 들고 고심을 했습니다. 아무리 연구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지나가는 소리에 콧구멍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바로 ‘자기 밖에 없다. 자기 외에 무엇을 찾느냐’ 하는 말입니다. 목탁 소리 듣고 있는 바로 이놈이 자기입니다. 이것 말고 무엇을 따로 찾습니까? 그때부터는 무거운 짐을 한시름 덜어놓았는데 그것을 우리는 한 소식, 견성見性했다고 말합니다. 견성한 사람은 배고플 때 밥 먹고 목마를 때 물 마시고 일할 때 일하는 것과 같습니다. 반야심경에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라는 구절은 깨달았다고 하는 새삼스러운 지혜도 없고 일체 얻을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수행자는 보리살타에 의지하는 겁니다. 그것이 한 소식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불법은 절대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추울 때 옷을 껴입고 더울 때 벗는 것처럼 온갖 분별 속에서 종소리, 목탁소리를 듣고 깨닫는 겁니다. 마음을 다 비우고 어떤 생각에도 사로잡히지 않으면 종소리는 종소리뿐이고 잡념은 잡념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깨달은 자리가 내가 찾고 있던 본래면목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 외에 따로 주인공이고 자성이랄 게 없습니다. 여기서 알아차려야 하는 것은 바로 보고 듣고 느끼는 것입니다. ‘소소영영昭昭靈靈’하다는 것은 흐리멍텅한 것이 아니라 분명히 듣고 보고 느껴서 ‘바로 이놈이다. 이것 말고 아무것도 없다.’고 알아차리는 겁니다.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고 날로 마음에 가려져있던 감정이나 산란한 마음들이 차차 사라지고 혼침도 사라집니다. 마음에 끼어있던 그늘이 걷히니 소통이 됩니다. 몸은 마음의 그림자입니다. 마음에 그늘이 끼면 곳곳에 병이 납니다. 어떤 소리를 듣고 스트레스가 쌓였다면 수도인의 자격이 없는 겁니다. 마음에 생각을 품지 말고 비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비우면 내가 보고자 하는 자성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어떤 법문도 이 이상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 마음에 내가 도달하면 의심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종소리가 나자 종소리를 통해서 나를 알았다는 겁니다. 종소리는 멸하지만 ‘듣고 있는 나’는 종소리를 듣고 있다고 해서 나지도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는 겁니다. 종소리를 들었지만 소리 없는 소리도 들었다는 겁니다. 소리 없는 소리는 종소리를 알아차리는 그놈이라는 겁니다. 그놈은 영원히 불생불멸입니다. 그러니 초발심 때 깨닫는 것을 무시해버리면 세월이 흘러도 깨닫기 어렵습니다. 초발심 때 바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법문을 바로 듣고 있는 놈 보고 있는 놈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종소리를 듣고 있는 내가 바로 나 자신임을 알지 못하고, 온갖 생각이라고 하는 환상에 사로잡히면 목전에 있는 물체가 내 눈에 들어오지 않고 종소리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한 생각 딱 비워버리면 소소영영하게 똑똑히 보입니다. 즉 수행하면서 소소영영하게 마음을 유지하라는 말입니다. 일상생활에서 항상 앉아있을 때 소소영영하게 앉아있으라는 말입니다. 일상생활 자체가 불법이고 도이고 수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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