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갖고 있는 괴로움의 근원적 뿌리를 빼내는 방법은 전통적인 수행으로 가능하다. 최근 서점에서 힐링과 명상에 관련된 책들을 많이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내용은 대부분 국부 치료하는 정도에 그친다. 마치 아이들이 쓴 약을 먹지 못해서 달달하게 만들어둔 약처럼 말이다. 그래서 당장에 먹기는 좋지만 뿌리 깊게 박힌 병을 치유하려면 결국 쓴 약을 먹어야 한다. 지금부터 이야기 할 부분은 입에 조금 쓸지도 모르겠지만, 병을 치유하는 근본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불교를 공부하는 데도 세 가지 부류가 있다. 하나는 불교 학자들이다. 차에 비유하자면 부속품 하나하나를 기재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없다면 불교가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처럼 카센터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운전도 할 줄 알고 차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고 있어서 웬만한 고장은 다 고쳐낸다. 또 차를 모르는 사람에게 차를 가르쳐주기도 한다. 그 다음이 운전만 하는 사람이다. 차에 대해서 전혀 지식이 없고 그저 운전대만 잡을 줄 아는 사람이다. 미국같이 큰 대륙에서 자동차로 여행을 하다보면 차가 고장날 때가 있다. 황량한 벌판 위에서 자동차가 멈춰버린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미국인들 중 대부분은 집에 간단한 자동차 수리를 위한 공구가 구비되어 있다. 어릴 때부터 자동차를 어느 정도는 손 볼 줄 안다는 얘기다. 그래서 그들은 벌판 위에서 차가 멈춰도 스스로 고치는 법을 안다. 결국 긴 여정을 원만하게 마무리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들 중 자동차를 알고, 고칠 줄 아는 이란 뜻이다.

부처님 당시에는 특정한 공간의 ‘절’이 없었다. 그들은 나무 밑에 살고 얻어 먹었다. 단체로 모여 다니며 탁발을 하면 신도들에게 부담이 될 것 같아서 각자 떨어져서 살았다. 각각 따로 지내다가 부처님의 법문을 듣기 위해 모여들고 헤어지고 하는 식이었다. 부처님은 그들에게 차를 한 대씩 선물했다. 자유롭게 살라는 뜻이었다. 그들은 카센터도 없는 곳, 숲 속, 굴 속, 나무 아래에 살았다. 당시에는 글도 없고 책도 없어서 스스로 차를 고치는 법을 숙지하고 있어야 했다. 어쩌다가 문제가 생겨도 거리가 멀어서 카센터에 갈 수도 없는 지경이었다. 그저 언제 어느 때에 모이는 지만 알고 살 뿐이었다. 부처님이 선물했다는 차가 바로 ‘공부’다. 스스로 숙지하고, 자세히 알아듣고 받아들여야 제대로 삶에 적용시키며 살 수가 있다.

부처님 경전에 보면 부처님은 끊임없이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 또 처음에는 산문으로 설하다가 후에는 운문으로 설한다. 이는 잘 외우라는 뜻이다. 똑같이 반복해서 외우고, 운문으로 일러줘서 더 외우기 쉽게 한 것이다. 물론 지금은 스마트폰만 열면 모든 정보가 다 들어있으니까 어쩌면 훨씬 사정이 나아졌다 할 수도 있겠다.

우리가 교재로 삼고 있는 ‘나라고 불리어지는 것에 대한 알아차림’은 팔리어로 ‘아나 빠나 삿띠 바와나 숫’이라는 경의 이름이다. 아나는 들숨, 빠나는 날숨, 삿띠는 알아차림이고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리는 바와나는 수행이고 숫은 경전이라는 뜻이다. 의미를 해석해보면, ‘나’라는 것은 불리어지는 이름이지 실제로 나는 없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말하는 것은 있지만 말하는 자는 없고, 걷는 것은 있지만 걷는 자는 없다. 즉 모든 것이 인연에 의해 형성되고 사라진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지금은 어렵게 느껴지지만 공부가 다 끝나갈 때 쯤에는 어렴풋이 알게 된다.

이 경의 근거는 부처님이 5비구에게 설한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후 사념처경, ‘마하 삿띠 빳다나 숫’이 나오는데, 그 경에서 수행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숨만 쉬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몸의 부정이라든지, 행위, 교리에 대해 거시적으로 이야기 해놨다. 그 중에서도 이 책은 호흡만 다루고 있다. 남방불교에서는 모든 수행의 기초가 이 ‘아나 빠나 삿띠’다.

우리는 힐링 수준이 아니고 마음속의 근본적인 괴로움을 뽑아버리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괴로움을 뽑아내느냐. 팔정도에 의지해서 뽑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팔정도를 모아보면 결국 계정혜다. 마음을 늘 안정되게 하고 매사에 판단을 잘 하는 게 팔정도다. 숨이 몸속을 드나들 때 그것만 알아차리면 되는데 왜 이렇게 번다하게 공부를 하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가 TV 화면을 볼 때 같은 장면을 보아도 그곳에 가본 사람은 그림 뒤의 것까지 아는데, 처음 보는 사람은 액면 그대로의 그림밖에 볼 줄 모른다. 미얀마, 태국을 가본 사람은 그 나라가 화면에 나오면 화면에 보이는 것 이상을 알아낸다. 이를 테면 저긴 어떻고 저떻고 주변엔 무엇이 있는지 말이다. 그러나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은 전혀 화면에 나오는 것 이상의 생각을 펼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들숨, 날숨을 똑같이 해도 깊이 있게 제대로 배운 사람과 그저 숨 쉬기만 하는 사람과는 차원이 다르다. 관세음보살 보문품이나 법화경을 읽고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사람과 그냥 입으로만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사람이 다르고, 보현행원품과 화엄경을 읽고 보현보살을 생각하는 것과 또 다르다.

예전에 법보신문에 실린 내 법문 중 이런 내용이 있다. “저마다 한 송이 꽃이라, 이름이 다른 다 한 송이 꽃이다.” 꽃은 우주적 차원에서 하나밖에 없다. 그래서 남을 이야기 하지 말고 자기 꽃만 잘 피우면 이 세상을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다는 내용의 법문이다. 내 공부를 어떻게 할지, 수행을 어떻게 할지, 내가 스스로 잘만 해낸다면 이보다 더 아름답게 세상을 사는 방법이 어딨겠는가.

 

* 이 내용은 2월 12일 도현스님께서 연암토굴에서 불자들에게 설하신 법문을 정리한 것입니다. 법문은 다음에 계속 이어집니다.

                                                          

도현 스님은
범어사 덕명 스님을 은사로 1963년 부산 범어사에서 입산 출가했다. 1965년 동산 스님에게 사미계를, 1972년 범어사에서 석암 스님에게 비구계를 받았다. 제방선원에서 30여년간 정진했으며 태국에서 5년 동안 위빠사나 수행을 체득한 스님은 현재 지리산 연암 토굴에서 홀로 수행자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저서로는 ‘조용한 행복’, ‘나라고 불리어지는 것에 대한 알아차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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