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동백이 흐드러지게 피어 눈길을 유혹했었는데, 문득 눈을 돌려 보니 어느새 매화가 조화롭다. 계절의 변화는 때로 스산함을 불러오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대웅보전, 육화전, 만불전의 정초 관음예문 독송은 경내를 환희로 물들인다. 두 손 합장하고 열심히 독송하는 지혜월 도반의 모습이 맑다. 법회를 마친 후 햇살이 머무는 자리에 앉아 잠시 대화를 나눴다. “요즘 이른 시간 자리를 잡고 법회에 동참하는 모습이 예쁩니다.” 했더니 웃으며 “저희 집안은 제가 어렸을 때부터 독실한 불교 집안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도 모르게 습관이 된 것 같아요.” 하며 선한 미소를 짓는다.

혜원정사 지혜월 보살님.

“어릴 적부터 신행 활동을 하셨나요?” 하고 말문을 여니 겸손하게 고개를 젓는다. “아뇨, 신행 활동을 열심히 하신 부모님이 집에서 매일 하시는 일과를 보면서 친숙하게 불교를 받아들이긴 했지만 제가 절에 다닌 것은 1980년대 대학생 시절, 여름방학 때 양산 통도사 불교대학을 다니면서부터였죠. 물론 어머니가 부처님 법 공부를 해보라고 권하셨죠. 어머니도 외할머니가 불교에 귀의시켰어요. 저도 대대로 세세생생 변함없이 이어졌으면, 부처님께 귀의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외조모에서 어머니로, 그리고 딸로 이어져 내려온 집안의 불심이 얼마나 끈끈한지 모른다. ‘불자 집안’은 이것이 다가 아니다. 지혜월 보살님의 어머니와 이모님들까지 바로 혜원정사의 독실한 불자시라고 하니 부처님 안에서 화목한 그 인연이 놀랍고 부럽다.
“아무튼 그렇게 익숙해지다 보니 집안의 49재, 천도재, 영구위패 등을 절에 모시게 되었고 절에서 하는 큰 행사에도 참석했습니다. 어머니는 혜원정사 ‘원년 멤버’로, 네 자매가 다녔어요. 큰이모부터 불명이 문수행, 보현행, 관음행, 막내이모 금강장까지 보살계 계첩을 받았죠. 집안의 행사 때든 어느 때든 부처님 법대로 생활하려고 서로 노력했어요. 그러니 얼마나 열심히 기도 정진하셨겠어요. 저의 큰 복인 것 같아요. 저도 불교대학에서 배운 공부를 토대로 늘 부처님을 생각하다보니, 배필도 좋은 사람을 만난 것 같아요. 남편(인제대학교 제약공학과 교수)과 함께 경전을 독송하면서 남편의 부처님 공부도 빼놓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17년 정도 집에서 간경에 주력했죠. 아이들이 태어나면서부터 더욱 간절하게 수행한 것 같아요.”

지혜월 보살님이 간경에 매진한 지 거의 20년이 다 되어가니 불명의 ‘지혜’라는 이름에 차고 넘칠 법하다. 주로 어떤 경전을 염불하였는지 물으니 조목조목 쏟아져 나온다. “천수경, 관세음보살보문품, 관음정근 만독, 108참회를 3번 또는 1번 하되 참회기도 절을 하면서, 조념 관세음 모념 관세음 념념종심기를 했지요. 항상 부처님 곁에 머물려는 생각이 그칠 날이 없기를, 매 순간 알아차림을 했고 잠자리 들기 전 10분이라도 명상을 했습니다.”
절에 다니는 신도님들 중에는 부모님, 형제, 옆지기 등 소중한 사람을 먼저 보낸 상실감으로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기 시작한 경우가 많다. 지혜월 보살님에게도 가슴 저미는 사연이 있었다. “20년 전 어머니를 보내드리면서 49일 동안 매일 지장경을 읽었어요. 처음 경전을 읽을 때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을 많이 흘렸어요. 지장경, 금강경 독송을 하면서 차츰 어머님을 마음에서 보내드렸어요. 육화전에 외할머니, 부모님, 고모님, 친척들의 영구위패를 봉안했어요. 늘 함께 계시니 저는 너무 좋죠. 육화전에서 부모님, 친척 등 영가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며 절을 합니다. 그래서인지 마음이 한결 가볍고 외로움도 크게 느낀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지혜월 보살님이 혜원정사와 인연을 맺은지는 7년 정도 되었다. “가끔 절에 오기는 했지만, 큰아들과 작은딸의 수학능력시험 100일 기도에 동참하면서부터 열심히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7년 정도 됐군요. 지금 딸은 대학생이 되어 학업에 열중하고 있지요. 열심히 다니는 것 같아요.”
자식들로 시작된 이야기는 어느새 도반의 시부모님으로 이어졌다. “시부모님은 연세가 80대셔요. 정정하십니다. 두 분이 손잡고 산에 가셔요. 며느리 힘들지 않게 건강관리 잘해야 된다고 하시니 고맙죠. 저는 부모님 덕분에 불법을 만났고, 주지 스님께서 늘 강조하시는 습관, 몸에 서서히 물들어 습관으로 체화되도록 정진할 것입니다. 저도 두 분처럼 좋은 부모가 되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좋은 부모가 된다는 것은 정진이 습관처럼 익숙하게 몸에 배는 것이라는 지혜월 보살님의 말이 쉬운 듯 어렵다. 여든 연세에도 산에 오르신다는 보살님의 시부모님처럼 세월에 굴하지 않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해서일 것이다. 이야기를 마친 지혜월 도반이 합장하고 부모님이 계신 육화전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가벼운 걸음 걸음, 그러나 쉬 멈추지 않을 것 같은 굳센 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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