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은 아직 부산이다. 부산은 요즘 재개발이 한창이다. 옛 집을 허물고, 낡은 모습을 열심히 지워 나가는 중이다. 그 모습을 보고 누군가 말했다. “부산(釜山)에 산이 없어지네.” 내가 처음 부산에 왔을 때 깜짝 놀랐던 것이 세 가지 있다. 하나는 승용차의 천장이 보일 정도로 경사진 도로와 그 급한 경사에 집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길을 마치 평지를 걷듯 씩씩하게 걸어가는 사람들이었다. 모두가 부산다움을 삭제해 나가는 중에도 아주 부산스러운 풍경이 남아 있는 곳이 있다. ‘안창마을’. 그곳에 광명사(주지 무아 스님)가 있다.

 

광명사 입구

광명사에 대한 소개를 하기에 앞서 부산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이유가 있다. 사찰순례를 하다 보면 여러 풍경과 마주하게 되는데 대략 산속이거나, 도심이거나, 시골이거나, 도시거나 중 하나다. 그런데 내가 광명사를 본 풍경은 네 가지 가운데 어떤 것에도 포함돼 있지 않다. 공간이 주는 특별함이 아니라 시간이 주는 특별함이라고나 할까. 시멘트로 꽉꽉 채워 만든 다리, 슬레이트 지붕이 남아 있는 주변 민가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가는 다리 밑 길. 마치 이곳만 80년대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또 단청이 떨어져 나간 칠성각은 다시 채색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들 정도로 오히려 멋스럽다. 이렇게 풀어 나가니 마치 광명사가 아주 오래되고 낡은 절 같아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잘 정돈된 마당과 주지 스님의 원력으로 중창불사를 끝낸 여러 전각은 어디 하나 흠잡을 곳이 없다. 대웅전을 위시하여 지장전, 칠성각, 범종각, 깔끔한 대웅전 앞마당과 비견되는 넓은 뒷마당은 아주 정갈하게 잘 갖춰져 있다.

대웅전 전경

광명사는 신장도량이다

주지 무아 스님은 미국과 대만, 중국에서 아주 오랫동안 공부를 했다. 오죽했으면 은사 스님이 “그만 좀 하라.”고 붙잡을 정도였다고. 중국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나서는 지체 없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외국에서 만난 여러 인연들이 계속해서 그곳에 머물러 주길 청했지만, 회향을 한국에서 하고 싶다는 생각에 곧바로 광명사로 왔다. 그때가 2000년 6월 중국 남경대에서 졸업을 한 직후였다. 광명사는 당시에도 전통사찰이었지만, 칠성각 하나만 온전히 남아 있는 모습이었다. 곧바로 칠성각과 범종각을 보수하고 지장전과 대웅전 불사까지 이어갔다. 공부만 하던 스님에게 불사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도로 문제 때문에 어려운 일도 있었고, 포교나 불사에는 문외한이어서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어.” 하지만 그때마다 좋은 인연이 스님의 일을 거들었다. 외국에서, 각처에서 스님의 불사를 돕고자 뜻이 모였다. 공부한다고 떠난 외국에서 얻은 건 비단 지식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광명사를 두고 인근 어르신들은 신장도량이라 부른단다. 가피를 잘 입는다는 뜻이지만 돌이켜 보면 신장처럼 외호해 줄 좋은 인연의 성취를 뜻한다 할 수도 있겠다.

광명사 주지 무아 스님

봉사는 실천불교

“부파불교는 지나치게 교학적이고 현학적이어서 대중과 멀어졌어. 대중과 가까워지려면 실천적이어야 하며 대사회적이어야 해.” 스님을 분명히 어디선가 뵀다 생각하고 기억을 더듬어 봤더니 적십자봉사회에서 법문하시는 걸 본 적이 있었다. “절에 중요한 행사가 있어도 신도들이 봉사하러 간다고 하면 다 가라고 해. 공부와 신행을 회향하는 방법이 바로 봉사거든.” 올해로 14년째 스님은 지역 어르신들을 초청해 경로잔치를 열고 있다. 동네 특성상 어르신들이 많아 잔치가 있는 날이면 200~300명의 어르신이 광명사를 찾는다. 어릴 때 조부모님 손에서 자란 스님은 유독 어르신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어르신들을 봉양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경로잔친데, 이제는 다른 동네 어르신들이 오고 싶은데 왜 초청 안하냐고 섭섭해 하실 정도야. 선물을 준비하고 내어드리는 일이 즐겁고 기뻐. 어르신들은 선물의 값어치보다 누군가 내게 관심을 가져 준다는 것에 더 감동하시는 것 같아. 대문을 열고 어르신들을 모시니 저절로 소통이 되고 포교가 되는 거지.”

장자가 나를 깨웠다

무아 스님은 은사 스님의 인연으로 덕민 스님을 친견할 기회가 많았다. 중국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덕민 스님과 공양 자리를 함께 하게 됐다. 문득 공부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스님께 말했다. “스님, 제가 장자를 다섯 번 읽었는데 내용이 참 좋았습니다.” 으쓱한 마음에 스님의 칭찬을 기다렸는데, 돌아온 대답은 달랐다. “허허. 나는 이백 번 읽었다!”

“그때 참 부끄러웠어. 은사 스님은 나더러 공부가 질리지도 않냐고 말하실 정도였는데, 장자 다섯 번 읽은 건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지. 장자를 이백 번 정도는 읽어야 공부를 제대로 한 건데, 나는 수박 겉핥기식으로만 했던 거지. 그래서 초발심으로 돌아가서 다시 공부를 해야겠다 생각했는데, 그때 만난 스님이 무비 스님이셨어. 문수선원에서 법화경을 시작으로 한 10년째 수업을 듣고 잇는데 참 재미있고 즐거워.” 무비 스님의 강의를 처음 듣고 일주일 동안 환희심에 젖어 있었다는 스님은 배움의 기쁨을 더 많은 곳에 알리고 싶다는 원력을 품고 있다. 도서관을 만들기 위해 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돈만 생기면 책을 사다 나르다가 귀국길에 정말 책만 들고 왔다는 스님. 지금은 법당 한편 책장에 빼곡히 채워 뒀지만, 언젠가는 스님이 지을 학교에 오롯이 채워질 귀한 공양이다.

“내가 언제까지 있을진 모르겠지만….” 자꾸 단서를 다는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 어딜 자꾸 가려 하세요?” “지금 떠난다는 얘기가 아니야.(웃음) 그런데 내일 떠날 수도 있어. 우리는 언젠가는 떠난다는 마음으로 살아야 해. 머물러 있으면 타성에 젖어서 여기가 내 절이라는 생각에 빠지게 되거든. 언제든 떠난다는 마음을 가져야 욕심이 안 생기니까, 늘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스님은 신도들에게도 늘 말한다. “며느리가 예쁜 짓 하면 손에 하고 있는 금반지 빼 주라고 얘기해. 언제 떠날지도 모르는데, 움켜잡고 있으면 욕심인데 줘 버리면 며느리가 얼마나 좋아하겠어. 딱 먹고살 만큼만 갖고 있고 나머진 나눠 줘 버려야지 욕심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거야.” 농담 속에 명쾌한 답이 있었다.

사찰의 문을 열어 본 기억이 없다. 일주문엔 문이 없어서 못 열었고, 천왕문이나 큰 문은 일반인인 내가 여닫을 수 없다. 사천왕이 그려진 광명사 문은 참 가볍다. 일부러 문을 열었다 닫아 봤다. 광명사답다. 누구나 언제든 이 문을 열고 “스님~” 하며 달려올 것 같은 곳, “부처님~” 하면 법당에 앉아 있는 부처님이 벌떡 일어나 나를 맞아 줄 것만 같은 이 도량이 바로 광명사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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