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혜원정사 도량에서 5월 18일 부처님전에서 가약佳約을 맺는 불교식 혼례인 ‘화혼식(華婚式)’이 열렸다.

5월 어느 주말, 감로비가 내려 도량의 마른 땅과 더위를 적시자, 우중의 잿빛 풍경을 밝히는 빨간 카펫 위로 작은 발들이 종종 걸음을 옮겼다. 선두에 선 아이가 향탕수를 뿌려 도량의 기운을 맑히자 두 화동이 꽃비를 흩뿌리며 뒤를 따랐다. 평생의 도반, 그 첫걸음을 내딛는 두 사람을 위한 청정한 꽃길이 열렸다.

5월 18일 부산 혜원정사 도량에서는 특별한 의례가 거행됐다. 부처님전에서 가약佳約을 맺는 불교식 혼례인 ‘화혼식(華婚式)’이 열린 것이다. 혜원정사 사회복지법인 ‘혜원’에서 근무하는 신랑과 신부는 일반적인 서구식 결혼 대신, 부처님 전에서 정법의 길을 걸어가는 도반으로 거듭날 것을 맹세하는 화혼식을 선택했다.

이날 화혼식은 전해오는 식순에 따라 개식을 알리는 타종 5회, 주례법사 스님 등단, 신랑신부 입장, 헌화, 상견례, 예물교환, 혼인서약, 성혼선언주례사 등 순서로 이어졌다. 식의 전후를 장식하는 화려한 연주와 축가를 생략하고 불법승에 귀의하겠노라는 삼귀의로 식을 열고 네 가지 큰 서원(사홍서원)을 염송하며 식을 맺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신랑, 신부는 화동의 뒤를 이어 나란히 입장했다. 새신부의 상징과도 같은 부케가 이날만은 신랑의 손에도 들려 있었다. 신랑은 다섯 송이의 꽃을, 신부는 두 송이의 꽃을 법사 스님을 통해 부처님 전에 헌화한다. 신랑의 꽃은 불단 동쪽에, 신부의 꽃은 불단 서쪽에 올려졌다. 꽃으로 맺어지는 화혼식의 의미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장면이다. 

이날 두 사람을 위해 헌화하고 축원해 준 혜원정사 주지 원허 스님은 축원에 앞서 꽃 공양의 의미에 대해 설명했다.
불교의 결혼을 ‘화혼식(華婚式)’이라고 부르는 데는 석가모니부처님 본생담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석가모니부처님이 전생에 선혜라는 이름으로 수행할 때, 마침 연등 부처님이 그 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누구나 연등부처님께 공양하고 싶어 했으며 선혜 선인도 마찬가지였다. 꽃 공양이 으뜸이라 했으나 선혜 선인은 도저히 꽃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때 일곱 송이 꽃을 든 구리 선녀가 있었고 선혜 선인은 사정을 밝히며 꽃을 나누어 줄 것을 청했다. 자신도 연등부처님께 공양해야 한다며 사양하던 구리 선녀는 선혜 선인의 지극한 불심을 읽어 “일곱 송이 꽃을 줄테니 두 송이는 저를 위해 올려 주시고, 세세생생 저와 부부의 연을 맺겠노라 약조해 주십시오.”라고 당부하며 선혜 선인에게 꽃을 모두 주었다.
마침내 꽃을 구한 선혜 선인은 자신을 위해 다섯 송이를, 구리 선녀를 위해 두 송이를 연등부처님에게 공양하고 다음 생, 그 다음 생에도 구리 선녀와 부부의 연을 맺어 약속을 지켰고 내세에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를 받게 된다. 

여기서 유래하여 불교식 혼례에 화혼(華婚)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단지 세속적 의미의 결합이 아닌 함께 삼보에 귀의하여 불제자로 살아가겠다는 성스러운 다짐의 장이 곧 화혼식인 것이다. 곧 전생으로부터의 깊은 인연을 마음에 새기고 현세에 그 인연을 꽃피워 부처로 나아가는 의례이며 부처님의 행을 본받아 실천하는 불제자로서의 새로운 삶의 출발점이다.

원허 스님은 “신랑이 꽃을 바친 동쪽과 신부가 꽃을 바친 서쪽이라 하여 해가 뜨고 지는 방향을 상징하며 영원히 변치 않겠다는 의미로서 부처님께 꽃을 올리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한 구절의 법문을 듣기 위해 선혜 선인과 구리 선녀가 힘을 모아 일곱 송이 꽃을 연등부처님께 바친 슬기가 이 부부에게도 항상 있게 하소서.”라며 축원문을 읊었다.

세속을 등지고 출가 수행하여 부처를 이루었으나 석가모니부처님은 세속의 살림살이에 대해서도 적절한 법문을 펼치셨다. 부부의 인연과 도리에 관한 가르침도 적지 않다. 먼저 어떤 사람이 배우자로 적합한지에 대한 말씀이다.

부처님께서 사왓티 기원정사에 계실 때였다. 어떤 바라문에게 예쁘게 생긴 딸이 있었는데, 네 사람의 청년이 딸에게 청혼을 해왔다. 한 사람은 이목구비가 반듯한 멋쟁이였고, 또 한 사람은 비록 나이는 들었지만 사회적으로 출세한 사람이었으며, 세 번째 사내는 명문 집안의 아들이었고, 네 번째의 사내는 선량하고 덕이 있는 사람이었다.
바라문은 어떤 사람에게 딸을 주어야 할지 몰라서 부처님께 여쭈기로 하고, 꽃과 향을 가지고 기원정사로 부처님을 찾아갔다. 그는 부처님께 인사를 올리고 그간의 사정을 말씀드리고 조언을 청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바라문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맹서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능력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으면 사윗감으로 적당하지 못하다. 멋이나 출세, 가문이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오직 선량함과 덕만이 평가의 기준이다.” 부처님은 다시 간략하게 말씀하셨다. “멋도 좋고 사회적 출세도 좋으며 가문의 명문도 좋다 하리라. 하지만 사람에겐 덕행이 가장 중요하다.”『자타카』

부부로 맺어졌다면 마땅히 서로에 대한 도리를 지켜야 한다. 『시가라월육방예경』에는 남편을 대하는 아내의 도리에 대해 나와 있다. 부처님께서 시가라에게 이르기를, “아내는 남편을 이런 자세로 섬겨야 한다. 남편이 밖에서 돌아오면 일어나서 맞이해야 한다. 남편이 밖에 나가면 집안을 잘 정리하고 음식을 만들고 기다려야 한다. 딴 남자에게 마음을 품지 말고 남편이 잘못을 꾸짖더라도 얼굴을 붉히며 대들지 않아야 한다. 남편의 의사를 존중해 주고, 재산을 감추거나 빼돌리지 말아야 한다. 남편이 휴식을 취할 때는 편히 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잡아함경』 「선생경」에서는 아내를 대하는 남편의 도리에 대한 말씀도 찾아볼 수 있다. 부처님이 짓자꾸따 산에 계실 때, 시가라에게 말씀하셨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되 다섯 가지에 힘써야 하느니라. 출입할 때에 예절로써 대하라. 위엄을 지켜 딴 여자를 사랑하지 말라. 의식주의 걱정이 없게 하라. 때를 맞추어 장신구를 사주어라. 집안 살림을 믿고 맡겨라.”
계급과 신분의 권위가 철저했던 고대 인도사회에서 설해졌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대단히 파격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오로지 사람 됨됨이가 제일이며 남녀의 구분을 두지 않고 상호존중이 바탕이 되는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비껴가지 않는 법문이다.

2,500년을 관통해 온 법문을 서로 나누며 백년가약을 맺었다. 그 법문 안에 사랑과 평온과 화합이 다 들어 있으니 해로하여 여법하게 회향하는 것은 다시 출발선에 선 두 도반의 몫이리라.

 

- 불교식 혼례 화혼식 -

오늘날 전해지는 불교식 결혼이 정립된 역사는 오래지 않다. 1917년 불교사학자 이능화가 『의정불식화혼법擬定佛式花婚法』이라는 불교식 혼례법을 만들어 발표했다. 이능화가 이를 집필할 때 석가모니본생담인 선혜선인善慧仙人의 설화를 비롯해 『대방광불화엄경』에서 위덕태자와 묘덕동녀가 혼인하여 부처님에게 예배드린 설화, 태국의 불교 혼례 등을 참조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치른 불교 혼례로는 1918년 경성 각황사覺皇寺에서 치른 혼례가 최초로, 이날 천 명의 하객이 모였다고 하니 당시 불교 혼례에 대한 호응이 짐작 가능하다.

1927년에 ‘화혼식’이라는 찬불가가 발표되기도 하였다. 당시의 불교계 월간지 『불교』에서 전국에서 치러지는 불교 혼례를 계속 소개한 것으로 보아 1920~1930년대에 활기를 띠고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1927년에는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인 백용성 스님이 『대각교의식大覺敎儀式』을 펴내면서 불교 혼례의 유래와 함께 수정한 내용을 실었고, 1935년에는 불교 의례를 근대적으로 집대성한 승려 안진호가 『석문의범釋門儀範』에 다시 수정・보완한 혼례 내용을 제시하였다.

 

불교 화혼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주례법사가 신랑 · 신부를 인도하여 부처님을 향해 꿇어앉게 하며, 신랑 · 신부의 양옆에 배도陪導가 따른다.

② 신랑・신부는 오분향五分香을 각각 사른다.

③ 주례법사가 삼귀의三歸依를 외고, 신랑・신부도 삼귀의를 한 뒤 부처님에게 삼배한다.

④ 주례법사가 혼인을 고하며 부처님에게 증명을 청하는 설송說頌을 범음梵音으로 외운다.

⑤ 신랑이 다섯 송이의 꽃을 부처님에게 바치고, 신부가 두 송이의 꽃을 신랑의 손을 거쳐 전달하면 주례법사가 불전에 올리고 나서 신랑・신부는 부처님에게 삼배한다.

⑥ 주례는 신부・신랑에게 각기 혼인에 임하는 마음가짐을 묻고, 신부와 신랑은 이에 답함으로써 혼인서약을 한다.

⑦ 신랑이 신부에게 화관花冠을 씌워주고 홍상紅裳을 입혀준 다음 신랑・신부가 부처님에게 삼배한다.

⑧ 대중이 다함께 여래십대발원문如來十大發願文・사홍서원四弘誓願・찬불게讚佛偈를 읊는다.

 

1927년에 백용성이 발표한 불교 혼례에서 주목할 만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부처님에게 혼인을 고하고 증명을 청하는 절차 대신에 계戒를 받도록 함으로써 혼례를 계기로 불자로서의 삶을 다짐하는 시간을 중요하게 다룬 점이다.

둘째, 의례 속에 남녀평등을 실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전의 혼인서약이 봉건사회의 가부장적 남녀차별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면 남녀 구별없이 부부간의 도리와 맹세를 지키는 내용으로 구성하였고, 신부의 꽃은 신랑의 손을 거쳐 부처님에게 바치도록 하던 것을 신부가 직접 바치도록 함으로써 여성을 독립적 존재로 인정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1935년에 안진호가 『석문의범』에 수정 제시한 화혼의식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서구식혼례가 확산되면서 불교 혼례에도 이러한 요소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는 점이다. 화동・화녀의 등장, 신랑・신부에 대한 소개, 예물교환에 해당하는 신물 교환, 주례사에 해당하는 유고諭告, 내빈축사, 축전낭독 등이 등장함으로써 의례의 절차와 요소가 현대화되고 다양해졌다.

둘째, 전반적으로 합리성을 추구하고 상세한 설명으로 실용적 지침이 되도록 노력했다는 점이다. 예물 교환에서 반지보다 염주를 권장하고, 혼례복은 불교 예복이 나올 때까지 일반 한복으로 하되 신랑은 양복도 무방하도록 열어 놓았으며, 헌화에 쓰는 꽃은 조화도 무방하다고 보았다. 또 불전에는 간략하게 반배례半拜禮하도록 하고, 주례사에 해당하는 유고를 생략해도 무방하다고 하였다.

셋째, 음악과 이벤트 요소를 중요하게 다루었다는 점이다. 화동・화녀가 꽃을 흩뿌리며 식장에 들어오고, 내빈착석과 신랑・신부 입장 및 불전에 배례할 때마다 오르간이나 피아노를 울리게 하며, 개식할 때 종을 다섯 번 치거나 폭죽을 울리도록 함으로써 축제 분위기와 장엄함을 돋보이도록 하였다.

현재 불교 혼례는 이러한 안진호의 『석문의범』을 참조하는 가운데 사찰마다 다양하게 치르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의 『통일법요집』에 소개된 혼인의식을 보면 신물 교환과 내빈축사・축사낭독을 없애고 혼인서약을 남녀 구분 없이 간결한 문장으로 대체한 점을 제외하고 『석문의범』의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참고: 문화체육관광부 문화데이터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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