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악을 저지르지 말고 모든 선을 행하여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하라. 

이것이 모든 부처의 가르침이다.” (諸惡莫作 諸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위 내용은 과거칠불(過去七佛)이 공통으로 계율의 근본으로 삼은 칠불통계게(七佛通戒偈)의 게송이다. ‘선을 행하여 마음을 깨끗이 하라’는 가르침은 역대의 모든 부처가 공통으로 추구한 바다. 간단명료하여 마음 깊이 새기기도 쉽고 실천하기에도 좋은 말씀이다. 너무 쉬운 나머지 이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소리같이 들린다. 쉽다고 어디 실천하는 것도 쉽다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당나라의 도림 선사는 도(道)의 대의(大義)를 물어온 문장가 백낙천에게 ‘삼척동자도 알지만 팔십 노인도 실천하기는 어려운 일’이라고 한 것이다. 그때 역시 칠불통계게를 도의 대의라고 설했던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선(善)하게 살고자 한다. 경우에 따라 악(惡)을 선택할 때도 있지만 삶의 전반에 걸쳐 추구하는 바는 그렇지 않다. 누구나 선에 대한 원천적인 욕구가 있으며 그러한 가치를 실현하며 살아간다. 마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삶이 너무 당연하고 모두에게 통용되는 것처럼 말이다. 사회적으로 아무리 악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도 자식에게 악을 가르치고 불행하기를 염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선하다는 것은 착하게 산다는 뜻이다. 착하게 산다는 것은 어떤 삶일까? 깡패의 오른쪽 팔뚝에도 ‘차카게 살자’ 또는 ‘일심(一心)’이라고 문신이 박혀있는 경우가 있다. 그들이 생각하는 착함과 한마음이 종교적 또는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의미와 같다고 할 수 있을까? 선의 기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에게는 모두 양심(良心)이 있어서 악한 생각과 마음을 갖거나 그런 행동을 하게 되면 가책을 느낀다. 설령 그 당시에 못 느낀다 하더라도 부정적 에너지가 일어나고 끔찍한 사건들이 발생하기 때문에 자신이 저지른 악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반성하게 된다. 반대로 선한 생각과 마음과 행동은 보람과 기쁨을 느끼게 한다. 당시에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로 인해 생성되는 기분과 에너지, 좋은 일들을 통해 자신의 선함에 대해 뿌듯하게 여기게 된다.

하지만 양심은 절대선(絶對善)의 기준을 제시해 주지 못한다. 누구나 갖고 있고 언제 어디서나 작동하는 것이 양심이다. 어떤 상황과 문제에 대한 가치판단의 기준을 제공한다. 하지만 지극히 주관적일 수 있다. 군부의 독재에 반대하는 시민들에게 국가와 권력의 당위성을 내세우며 보란 듯이 폭력을 자행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같은 상황에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괴로워하는 사람도 있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살펴보면 숱한 갈등과 분쟁은 자신이 선이라고 믿는 가치에 무게를 두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그것과 반대되는 것들을 그르다고 여기고 제거하는 방식으로 전개돼 왔다. 결국 힘의 논리에서 선과 악의 결정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옳고 그름이 선과 악의 바른 가치 기준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니라 힘을 가진 집단이 선을 주장할 권리를 갖춘 것이다. 역사를 승자들의 기록이라고 하지 않는가? 오늘날에도 그 전통은 이어진다. 사회 경제적으로 승자독식(Winner takes all)이라는 방식이 면면히 나타난다. 역사적 딜레마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또한 개인으로서의 가치판단과 집단이나 전체로서의 가치판단이 불일치하는 경우가 있다. 일치하면 다행이지만 상충되는 가치와 이념이 충돌할 때, 우리는 번민에 휩싸이며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이런 의문에 대해 인도의 경전 바가바드기타(Bhagavad Gītā)는 바른 지혜의 길로 인도해 준다.

인도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Mahābhārata)의 일부인 바가바드기타는 인도에서 대중들에게 가장 많이 읽히는 경전이다. 주인공 아르주나(Arjuna)는 전쟁상황에서 자신의 친족과 대치하게 되는데, 전투에 임해야 할지 말지 고민한다. 내가 물러서면 아군이 몰살당하거나 패배하고 전쟁에 참여하면 친족을 물리쳐야 하는 상황이다. 여기서, 비슈누(Viṣṇu)신의 화신인 크리슈나(Krishna)가 마부로 등장해서 혜안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구성된다.

지혜와 행위와 헌신의 길을 제시하면서 자신의 근기와 가치관에 따라 나름의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가르친다. 마지막으로 지극한 행복인 해탈의 길을 안내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단념과 포기를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즉 결과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선과 악을 구분하기 어렵고 선택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생각해야 하는가? 선악의 기준은 각자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자신의 욕심 부리고 집착하는 게 무엇인지 면밀히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고통과 불행은 탐욕과 집착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내가 순수한 의도로 어떤 일을 시작했더라도 과정상에 그 순수성이 왜곡될 수 있다.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 자신의 선을 위해 타인에게 해를 입힐 수도 있으며 목적과 수단이 바뀌는 목적전도가 일어날 수 있다.

 

도연스님은

카이스트 스님으로 알려진 도연스님은 카이스트에 입학해 전자공학을 공부하다 돌연 출가의 뜻을 품고 스님이 되었다. 이후 카이스트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등에서 에너지 명상과 참선을 지도했으며, 2015년에는 카이스트 기술경영학과를 10년만에 졸업 하고 오대산 월정사에서 원명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2016년 사미계를 수지하고, 현재 서울 강남 봉은사에서 어린이, 대학생, 청년부 지도법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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