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에 사랑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할 것이다. 공기가 없는 세상에서 사는 것과 다름없다. 우리는 늘 숨 쉬고 있고 공기는 항상 주변에 있다. 그리고 별생각 없이 살아간다. 감사함을 잊은 채 말이다. 사랑도 그렇다. 너무 익숙하고 항상 있기 때문에 그 필요성과 의미에 대해서 쉽게 지나친다. 우리가 살아있고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고 사랑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지만 쉽게 망각한다. 사랑이 없어 괴로울 때 비로소 그 중요성을 느낀다. 마치 숨쉬기 곤란한 상황에 공기의 소중함을 알고 목이 마를 때 물이 간절하듯이 말이다.

사랑이 없을 때 우린 외롭고 쓸쓸함을 느낀다. 존재의 이유를 상실하고 생명력은 점차 빛을 잃는다. 잃었던 빛이 다시 살아나는 순간이 있다. 막막한 고독감이 나를 휩쓸 때, 우주의 한 모퉁이에서 혼자라고 느껴질 때, 내 손을 잡아줄 누군가가 있으면 큰 위로가 된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는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런데 사랑을 뭐라고 정의해야 할까?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용어이고 아주 광범위하게 쓰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와 각도에서 쓰느냐에 따라 해석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사랑을 사전적 정의나 관념으로 설명하기엔 큰 한계가 있다. 그보단 오히려 우리가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여러 가지 모습을 통해 그 본질에 대해서 유추해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먼저 이성 간의 사랑이 있다. 불처럼 뜨겁게 타오르는 정열적인 사랑 말이다. 남녀의 사랑이든 천지만물의 생명이든 모든 존재는 음과 양의 조화와 사랑으로 탄생하고 생성된다. 또한 어린아이의 순수한 사랑도 있다. 얽히고설킨 이해관계를 떠나 ‘있는 그대로, 보이는 대로’ 보는 시선과 관심 말이다. 비록 자기중심적인 생각에 치우쳐져 있을지 모르나 왜곡되지 않은 그 마음만큼은 맑고 투명하다.

또 어떤 사랑이 있는가? 어른들의 성숙한 사랑은 경험과 연륜에서 나오는 분명함과 책임감이 있다. 지속적인 관심과 배려는 우리의 마음을 편안케 하며 이 세상을 굳건하게 유지한다. 친구와 형제들의 사랑은 의리와 우애로 아주 끈끈하다. 강한 결속력은 삶을 살아가는 지속적인 연대감을 형성한다. 더 나아가 부모가 자녀를 대하는 사랑은 사랑의 본질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의 사랑은 평생 끊임없이 자녀에게 향한다. 아낌없이 주는 사랑으로 자녀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원천적인 힘을 갖는다.

그렇다면 교육학에서는 사랑을 어떻게 볼까? 사랑학 강의로 알려진 ‘닥터 러브’ 레오 버스카글리아는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에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의 욕구를 잊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다. 관계에서의 사랑보다 더 원천적인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먼저라는 것이다. 그것을 욕구의 관점에서 다루었다. 표면적인 욕구가 아니라 더 심층적인 욕구에 대해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육체적인 편안함과 만족만을 위해 평생 허비하는 삶이 아니라 다른 중요한 욕구이다. 봐줬으면, 알아줬으면, 인정해줬으면, 성공했으면, 재미있게 살았으면, 인생을 즐겼으면, 살아있다는 게 얼마나 좋을지 알 수 있었으면 하는 욕구입니다.’

즉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작동하는 사랑도 중요하지만 자기 자신의 욕구에 대한 관심이 곧 사랑의 출발점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사랑에 대해 ‘실제로 사물을 움직일 수 있는 것, 아무리 써도 닿지 않는 힘의 원천’이라고 정의한다. 남녀 사이의 사랑으로 한정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가족 간의 애정, 친구와의 우정, 주위 사람들과의 관심과 배려, 더 크게는 ‘인류애’이며 우주적 사랑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자비심이라고 한다. 타인에 대한 무한한 사랑 말이다. 관세음보살이 중생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인 대자대비심(大慈大悲心)이다.

사랑을 에너지의 측면에서 보면 어떨까? 사랑은 나를 존재케 하는 원천이며 바탕의 힘이 된다. 사람과 사람이 맺고 있는 관계의 바탕에도 사랑이 있고 그 관계의 생명력을 유지시켜준다. 사람이 자연 또는 우주의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들과 맺고 있는 인연도 역시 그러하다. 애정을 갖고 키운 식물이 더 잘 자라고 애지중지하는 물건이 더 오래가는 것도 그 때문이다.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존재는 사랑과 관련되지 않은 게 없다. 보이지 않는 에너지 차원에서 관심과 애정이 전해지고 있다. 따라서 사랑의 반대말은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다. 좋든 싫든 내가 신경 쓰고 관심을 갖는 한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겪는 괴로움을 8가지로 정리했다. 그중에 원증회고(怨憎會苦)와 애별리고(愛別離苦)가 있으며 사랑과 관계된다. 원망하고 증오하는 사람과 만나는 고통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는 고통이다. 우리는 사랑으로 인해 고통스러울 수도 행복할 수도 있으며 결국 이 둘은 시절 인연에 따라 모습을 바꾼다. 어떤 인연이 언제는 좋았다가 나중에는 나빠진다. 좋은 인연이기에 기대를 했다가 실망할 수도 있고, 나쁜 인연이기에 기대를 안 했다가 오히려 만족을 느낄 수도 있다. 좋았던 인연이 예전보다 덜 좋아질 수도 있고, 싫었던 인연이 조금 덜 싫어질 수 있다. 인연은 모두 상대적이고 가변적이다. 좋든 싫든 내가 신경을 쓴다는 것은 생각을 하고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고 마음의 근본 자리에서 연결돼 있음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생텍쥐페리의 소설 『인간의 대지』에 나오는 구절을 소개하겠다.

“사랑이란 당신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도록 돕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사랑이 이러쿵저러쿵해도 결국 나 자신으로 귀결된다. 누군가 원하는 내 모습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힘이다. 왜곡된 사랑에서는 타인이 바라는 내 모습에 집착하게 된다. 하지만 진실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 내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할 때 자신의 본래 모습이 보인다. 사랑은 내 존재의 깊은 본성과 본질로부터 나온 가장 원천적이고 충만한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도연스님은

카이스트 스님으로 알려진 도연스님은 카이스트에 입학해 전자공학을 공부하다 돌연 출가의 뜻을 품고 스님이 되었다. 이후 카이스트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등에서 에너지 명상과 참선을 지도했으며, 2015년에는 카이스트 기술경영학과를 10년만에 졸업 하고 오대산 월정사에서 원명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2016년 사미계를 수지하고, 현재 서울 강남 봉은사에서 어린이, 대학생, 청년부 지도법사로 활동하고 있다.

저작권자 © e붓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