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은 더불어서 함께 살아가는 우정의 무대다. 누구든지 나름대로 삶의 목적을 추구하며 살아가지만 아무리 잘났어도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곤란을 겪게 된다. 행복은 결코 혼자만 잘 산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도울 때는 돕고 의지할 때는 의지하며 화목하게 살아가는 관계에서 오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전해온 존재에 대한 성찰은 조화와 협력이 우리의 근간이 되는 삶의 철학임을 암시한다. 사람 인(人)자를 보면 알 수 있는데, 두 존재가 의지하고 있는 형상의 본을 따서 형성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간(間)을 붙이면 인간(人間)이 되며 ‘사이’를 의미하는 간(間)을 썼다는 것으로 사람 사이의 관계가 삶의 중요한 요소임을 알 수 있다. ‘틈새’라는 말에서 ‘새’는 ‘사이’의 준말인데, 동물 ‘새’와도 관련이 있다. 하늘과 땅 사이를 오가기 때문에 영물로서 숭상했다. 이것으로 미루어 봐도 ‘사이’ 또는 ‘관계’를 중시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태생적으로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관계에서 오고가는 건 무엇일까? 

그것의 핵심은 바로 사랑이다.

 

이 사랑이 애정(愛情)이 될지 애증(愛憎)이 될지는 순전히 각자의 몫이지만 말이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하지 않는가? 미움은 사랑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지 전혀 관계없고 관심 없는 사람에게서 생기지 않는다. 사랑을 토대로 우리의 진정한 관계는 시작되며 근본적으로 우리 모두는 사랑의 결실이다. 이 세상에서 부모가 누군지 모를 순 있어도 없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존재는 사랑의 결과라는 것에는 많은 설명이 필요 없다.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부모님이 사랑으로 낳아주시고 길러주지 않았던가. 곧, 사자소학 첫 구절 부생아신 모국오신(父生我身 母鞠吾身)이다.

이러한 부모님의 사랑과 생명의 이치를 동양철학에서는 음양으로 설명했다. 절묘하게도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태극기에 음(陰)과 양(陽) 그리고 그것의 발전적 개념인 오행(五行),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의 핵심 이치가 담겨있다. 먼저, 태극기의 정중앙에는 붉은색과 푸른색을 합한 원형의 문양이 있다. 이것을 일컬어 태극(太極)이라 한다. 노년의 퇴계 이황이 17세의 어린 임금 선조에게 성리학의 기본 이념을 그림으로 정리해 올린 <성학십도>라는 책에 그 설명이 잘 되어있다. 여기서 태극 또는 무극(無極)으로 시작해서 오행을 거쳐 만물이 생성되는 이치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성학십도의 첫 번째 그림, 태극도(太極圖)

 

태극 안의 정적(靜的)인 음과 동적(動的)인 양이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며 대치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역동적인 변화·발전을 꾀하고 있다. 즉, 음양의 조화이며 합(合)하고 충(沖)하면서 에너지가 생성되고 변화한다. 마치, 연인사이에 썸(Something)을 딸 때, 정식으로 교제할 때 심지어 부부사이에서도 밀당(밀고당기기)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뻔하고 지루한 관계를 방지하고 설렘을 극대화할 수 있으며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 밀당도 적당해야 한다. 너무 밀면 멀어지고 너무 당기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태극도에서는 이러한 밀당의 극치를 보여준다. 음과 양의 조화를 기가 막히게 잘 표현돼있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적당함이란 바로 이런 것을 가리킨 말 아닐까? 이러한 음양의 조화는 불교의 중도(中道)나 유교의 중용(中庸)의 이치와 그 맥락이 같다.

 

 

태극기의 다른 문양을 보면서 사랑에 대한 또 다른 사유를 전개해 보자. 중국 신화에 나오는 복희씨(伏羲氏)가『주역(周易)』의 기본 코드인 8괘(八卦)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건곤감리 진손간태(乾坤坎離 震巽艮兌)가 그것인데, 그중 4개인 건곤감리가 태극기의 네 모서리에 배치되어 있다. 건(乾)과 곤(坤)은 하늘(天)과 땅(地) 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상징하고, 감(坎)과 리(離)는 물과 불 또는 달과 해를 의미한다. 태극의 음과 양, 건곤의 천과 지 그리고 감리의 달과 해, 그 뜻은 조금씩 다르지만 플러스(+)와 마이너스(-)라는 음양의 원리를 설명한 것임에는 동일하다. 곧, 우주의 기본 질서이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첨단과학의 디지털 문명은 0과 1이라는 단순한 이진법의 원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결국, 0과 1도 음양의 원리에서 비롯되었다.

고전에서 현대, 물질계에서 정신계에 이르기까지 이 법칙에 벗어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이해하고 활용함으로써 우주의 기본질서인 사랑의 도리를 깨달을 수 있다. 나아가 우리는 삶의 지평을 더욱 확장하여 더 조화롭고 행복할 게 살 수 있다. 사랑은 모든 생명의 근간이자 생산의 출발점이며 조화롭게 유지와 발전을 시킬 수 있는 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겪는 문제 또한 여기서 발생한다. 사랑 때문에 웃기도 하지만 그것 때문에 싸우기도 하고 슬픔과 불행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우리의 존재는 음과 양의 조화로 온전할지 모르지만, 그걸 쓰고 다루는 주체의식이 아직은 미숙하기 때문이다. 주체 의식은 음(-)도 아니고 양(+)도 아니지만 음과 양을 모두 포함한 중성(±)이다. 주체가 사라진 상태에서는 갈등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음과 양을 중간에서 조절해주고 중화시켜주는 중성의 역할이 중요하며 그 힘이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음양오행론에서는 토(土)기운이 동서남북의 중앙의 위치해 있으면서 각각 다른 기운을 중재하고 변화시켜주는 역할을 한다고 본다. 너와 나의 갈등, 이것과 저것의 갈등은 그것들만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 제 3의 요소가 있어야 한다. 형제들에게 있어서는 부모가 있어야 하고, 학생들에게는 선생님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우리에게 음과 양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중화의 힘이 있어야 한다.

사랑이 헤아려서 생각한다는 사량(思量)이라는 말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사유하고 판단한다는 것은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일이지만 그로인한 갈등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는 없다.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분별심 또는 사량분별이라고 한다. 아직 자신의 에고(Ego) 또는 이기심(利己心)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신을 위주로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판단의 근거는 자신의 이익과 생존에 치중되어 있다. 따라서, 이러한 탐욕이 가득한 사랑은 사량에 지날 수밖에 없다.

 

'다행히 사량을 뛰어넘은 사랑이 있다. 불교에서는 그것을 사무량심(四無量心)이라고 한다. 부처와 보살의 사랑이며 모든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고 괴로움과 미혹을 없애주는 자(慈)·비(悲)·희(喜)·사(捨)의 무한히 넓은 마음이다.'

 

자무량심(慈無量心)은 모든 이에게 즐거움을 베풀어 주는 마음이며, 비무량심(悲無量心)은 인류를 불쌍히 여기며 고통의 세계로부터 구해내어 깨달음의 기쁨을 주려는 마음이다. 희무량심(喜無量心)은 사람들이 통을 버리고 낙을 얻어 희열하게 하려는 마음이며, 사무량심(捨無量心)은 탐욕이 없음을 근본으로 하여 모든 존재를 평등하게 보고 미움과 좋음에 대한 구별을 두지 않는 마음이다.

이러한 사무량심이야 말로 세속적인 음과 양의 갈등을 조화하고 중재하며 평화를 이끄는 힘이 된다. 사랑은 상대를 헤아리고 생각하는 사량에서 시작할지 몰라도, 그것의 완성은 그 너머의 자비로운 네 가지 큰마음, 사무량심이다. 우리 모두가 사랑으로 태어난 존재임을 깨닫고 사량분별을 넘어 사무량심의 사랑을 주고받으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도연스님은

카이스트 스님으로 알려진 도연스님은 카이스트에 입학해 전자공학을 공부하다 돌연 출가의 뜻을 품고 스님이 되었다. 이후 카이스트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등에서 에너지 명상과 참선을 지도했으며, 2015년에는 카이스트 기술경영학과를 10년만에 졸업 하고 오대산 월정사에서 원명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2016년 사미계를 수지하고, 현재 서울 강남 봉은사에서 어린이, 대학생, 청년부 지도법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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