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이 생전에 남긴 마지막 노트에 이런 글이 적혀있다.

“나는 누구인가? 80을 넘긴 한 생을 산 내가 새삼스럽게 이런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져 본다. 왜? 무엇이 나로 하여금 오늘에 이르러 남다른 삶을 살게 했는지 나름대로 알아보기 위해서다.”

법정 스님도 생전에 나에 대해 물을 것을 강조하셨다. “나는 누구인가. 자신의 속 얼굴이 드러나 보일 때까지 묻고 또 물어야 한다. 건성으로 묻지 말고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귀 속의 귀에 대고 간절하게 물어야 한다. 해답은 그 물음 속에 들어 있다. 그러나 묻지 않고는 그 해답을 이끌어 낼 수 없다. 나는 누구인가. 거듭거듭 물어야 한다.”

우리는 왜 태어났는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알기 위해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 철학적이고 심오한 질문 같지만 누구나 할 수 있고 반드시 필요한 질문이다. 어떤 답이든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알게 모르게 모범 답안을 찾고 있는 것 같다. 나에게 맞는 답이 아니라 남에게 맞춘 답을 찾으려 한다. 모두가 함께 사는 세상이므로 상대방을 의식하는 건 지극히 정상적이다. 하지만 문제는 지나치다는 데 있다. 지나친 걱정이 우리를 더 얼어붙게 하는 것 같다. 결국 내가 나로 살기가 어려워진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답이 아니라 나답게 살아가기 위한 방편으로 나를 찾아야 한다. 편안한 마음으로 나를 살피도록 하자.

내가 누구인지 알아가는 것은 내 삶의 의미를 찾고 행복을 만들어 가는 일이며 나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물음이다. 나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질문이 다소 추상적이고 관념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런데, 바쁜 일상 속에서 언제 답이 나올지도 모르는 질문이 과연 우리에게 필요할까? 어떤 사람에게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절실하게 와 닿는 질문 일지도 모른다. 필요하고 안 필요하고는 자신이 느끼면 되는 문제다. 사람마다 때가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어느 순간 나를 찾는 질문이 크게 다가올 때가 있다. 그 때 답을 구하면 된다. 적극적으로 나를 파고들며 본질에 대해 숙고하는 과정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이것이 나만의 철학을 갖추는 것이고 명상적으로 살아가는 삶이다.

불가에서는 오래 전부터 화두(話頭)를 갖고 수행하는 문화가 있었다. ‘이야기의 첫 머리’라는 뜻이며 주제나 이슈를 말하기도 한다. 본래적으로는 말(話)보다 앞서는(頭)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문구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너머의 본질에 닿아야 한다. 그래서 그 말의 의미를 애써 해석할 필요가 없다. 역설과 비유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으며 깨침을 통해서 참된 의미를 알 수 있다. 깨닫기 위한 도구와 방편이다. 마치 뗏목과 같아서 강 저편으로 건너면 더 이상 필요가 없다. 오히려 계속 갖고 있으면 집착하고 공부에 방해가 된다. 언어 이전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으로써 활용하면 그만인 것이다.

화두는 대략 1,700여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 ‘무(無)’, ‘삼세 근’, ‘마른 똥 막대기’, ‘뜰 앞의 잣나무’, ‘이 뭣 고’, ‘부모에게 몸 받기 전, 진짜 나는 무엇이었던가’ 등이 대표적이다. 좋은 화두는 간절한 의문을 일으킨다. 나에게 좋은 화두가 남에게 별로 감응이 없을 수도 있고 남에게 와 닿지 않지만 나에겐 절실함을 일으킬 수도 있다. 얼마 전에는 좋았던 화두가 지금은 별 쓸모가 없을 수도 있다. 나에게 의문을 일으키는 화두여야 한다. 내 안의 참된 의심과 진정성이 깨어날 수 있어야 좋은 화두다. 그래서 성철스님은 화두를 들 때 ‘어떤 것이’ ‘어째서’라는 문제의식을 가지라고 강조했다.  

숭산 스님은 ‘Who am I? Only don't know. (나는 누구인가? 오직모를 뿐)'이라는 심플한 화두로 전 세계에 한국불교를 전파했다. 제자들에게는‘Only don't know, Only go straight (오직 모를 뿐. 다만 정진하는 거야)’ 라 하며 끊임없이 답을 찾기를 강권하셨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는 명확한 답이 있을 수 없다. 누군가 답을 찾았어도 다른 사람에게는 답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자 불립문자(不立文字)이기 때문에 말로써 표현할 수도 없고 전할 수도 없다. 그저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마음 간에 주고받을 수 있을 뿐이다. 내가 깨닫고 받아들일 수 있으면 된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인가를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가 묻고 내 힘으로 답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내 존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나다움’을 찾고 나답게 살아갈 수 있다.

법정 스님은 “나는 누구인가. 이 원초적인 물음을 통해서 늘 중심에 머물러야 한다.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한 각성을 추구해야 한다.” 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중심에 머문 다는 것이 어떤 뜻일지 같이 생각해 보면 좋겠다. 나를 찾는 과정에서 과연 무엇이 중심인지. 어떤 가치와 진실에 내가 닻을 내려야 할지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는 각자의 삶의 주인이며 자신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사유하는 철학자이다. 끊임없이 질문을 하며 내 안에서 찾은 나만의 답을 찾으면 좋겠다. 늘 문제의식을 갖고, 질문을 할 줄 아는 인간이 되자.

 

 도연스님은

카이스트 스님으로 알려진 도연스님은 카이스트에 입학해 전자공학을 공부하다 돌연 출가의 뜻을 품고 스님이 되었다. 이후 카이스트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등에서 에너지 명상과 참선을 지도했으며, 2015년에는 카이스트 기술경영학과를 10년만에 졸업 하고 오대산 월정사에서 원명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2016년 사미계를 수지하고, 현재 서울 강남 봉은사에서 어린이, 대학생, 청년부 지도법사로 활동하고 있다.

 

 
저작권자 © e붓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