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이란

 

마음속에

끄나풀(정보원)을

하나 두는 일이다

 

화나는 조짐을

미리 알려주기

때문에

 

사전에 화를

원천봉쇄

할 수 있다

간화선은 화두를 가지고 하고 염불은 불보살의 명호를 마음에 지니고 하며 위빠사나는 사띠(알아차림)를 가지고 한다. 그리고 독서나 간경을 통해서 수행을 북돋아 주는 많은 정보를 얻는다.

간화선은 신뢰하는 스님에게 화두를 받아 알 수 없는 의심을 지어가면서 선사의 의지를 간파하려고 애쓰는 중에 삼매에 이르고 선사의 법문을 들으며 지혜를 열어간다. 수행도 끝이 없고 깨달음도 끝이 없다.

염불 수행자 역시 믿음이 가는 스님에게 관세음보살, 문수, 지장, 아미타불 중에 한 불보살의 명호를 선택 받게 되면 주야 육시로 늘 불보살의 명호를 부르며 생활하는 것이다. 가령 관세음보살을 부른다면 입으로는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귀로는 듣고 머리로는 관세음보살의 자비로운 상호를 그리면서 일념 만년이 되도록 하며 즐기는 것이다. 아미타불은 무량수 무량광이라 늘 밝고 긍정적이고 아름다움을 사모하니 이 땅이 정토가 되는 것이다.

불사문중(佛事門中)에 불사일법(不捨一法)이라, 선의지를 가지고 하는 수행이 어디에 우월이 있고 좋고 나쁜 것이 있겠냐마는 사람의 성향이 서로 다르다 보니 수행의 방법도 다양한 것이다. 해서 자기가 선택한 수행을 독실히 잘 하면서 나와 다른 수행을 하는 이도 존중해 준다면 그런 사람이라야 비로소 수행자라 할 것이다.

먼저 불법을 배우고 수행하는 사람은 정법과 방편, 법 · 비법을 구분할 줄 알아야한다 그렇지 못하면 평생 절에 다녀도 자기의 정체성도 모르는 불자가 되어 자녀들이 타종교로 떠나기도 한다.

정법(正法)이란 불교는 인격 수양을 하는 가르침이라 믿는 것이고, 방편법(方便法)이란 복은 지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비법(非法)이란 복을 빌기만 하는 것이다. 물론 절박한 현실이 있어서 기복을 하기도 하지만 적당히 하라는 것이다. 병이 나서 의사에게 의지하듯이 때론 자력으로 못할 때가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이다.

지난번에 말한바 있지만 나는 위빠사나를 하는 스님이라 지금부터는 위빠사나에 대해서 ①위빠사나란 무엇인가 ②출입식관이란 무엇인가 ③수행의 요령, 이 세 가지를 간략하게 설명하려고 한다.

먼저 ‘위’란 무상 · 고 · 무아인 삼법인을 포함하고 있는 빨리어다. 무상 · 고 · 무아는 불교의 세계관, 인생관이다. 세상은 늘 변해가고 있고 인생은 즐겁다가 괴롭다가 그저 그럴 때가 있다. 그렇게 살고 있는데 실상 나라고 하는 것을 찾아보니 오온개공이라, 실체가 없다. 도대체 이게 무엇이란 말인가. 여기서 우리가 자기의 정체성인 ‘무아’를 찾아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늠 짓는 것이 ‘빠사나’다 그래서 위는 존재의 실상(삼법인, 사성제), 빠사나는 ‘본다’. 그래서 문제를 파악해서 대안을 갖고 사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인생의 실상을 파악해서 잘 사는 공부가 위빠사나 수행인 것이다

출입식관이라는 숨 쉬는 것을 보는 것이다. 들숨에 ‘붓’ 날숨에 ‘토’, ‘붓’, ‘토’, ‘붓’, ‘토’ 자연스런 호흡에 따라 ‘붓’, ‘토’, ‘붓’, ‘토’ 들숨에 붓 날숨에 토. 일상에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정성스럽게 해놓고 틈새가 생길 때 마다 그렇게 하면 된다. 그러다 보면 틈새 공부가 내 생활의 전체에 스며들어서 붓토 하면서 온갖 일을 다 하게 된다. 이쯤 되면 공부와 생활이 하나가되어 사는 것이 수행이고 수행이 사는 것이다. 사는 것이 노는 것이고 노는 것이 사는 것이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붓토는 붓다의 주격인 팔리어로 잘 아시는 분, 체험하신 분, 편안하신 분이다. 잘못 알면 염불 수행인가 하게 되는 되 일반적인 염불 수행은 타력이다. 이 붓 · 토라고 하는 수행은 불수념(佛隨念)으로 부처님의 잘 아시는 인격, 체험하신 인격, 편안하신 인격을 나도 따라서 닮겠다는 자력의 수행이다. 붓다의 덕성을 늘 수념 하다 보면 우리도 붓다 가까이 갈수 있는 것이다.

출입식관 수행은 누구나 하루 24시간 지속하고 있다. 누구나 눈앞의 사물이 눈 안에 다 들어와 있지만 관심이 없으면 보이지 않다가 관심을 주면 보이듯이 출입관 수행도 늘 하고 있는 호흡을 수시로 챙겨야겠다는 생각을 염두에 두고 관심을 기우리면 누구나 그때부터 출입식관 수행자가 되는 것이다.

신도들이 계를 받을 때 ‘살생하지 마시오, 이 계를 지키겠습니까?’하고 세 번 묻고 답하면 계 지키는 사람이 되듯이 이 출입관 수행은 스스로 그렇게 하기로 작정만 하면 누구나 수행자가 되는 것이다.

얼마나 쉬운가 이미 수십년 하고 있는 일을 마음 써서 관심만 기울이면 되는 것이니까 아무것도 사전에 준비할 것도 없고 시간과 장소도 불문이다. 이것은 그 어떤 수행을 선택해서 한다 하더라도 이 사실만 제대로 인지하면 출입식관을 안 하더라도 출입식관을 함께하게 되는 근본 수행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수행을 하라 마라 하지 않고 그 사람이 오래도록 해온 수행을 그대로 지속 할 것을 권유한다. 혹여 아직 무슨 수행을 해야 할지 안이 서지 않은 분들에게는 이 수행을 권한다. 이상 출입식관과 주변 수행의 관계성을 약간 언급해 보았다,

그럼 출입식관 수행은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하는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드리자면 사띠(알아차림) 삼빠찬냐(살핌)를 가지고 한다. 알아차림이란 정념(正念)을 말하고 살핌이란 정지(正知)를 말하는데 정념은 지(止)고 정지는 관(觀)이다 그래서 지관수행 정혜쌍수(定慧雙修)라 하는 것이다. 간화선은 화두를 참구 하면서 선정에 이르고 선사의 법문을 들으면서 지혜가 개발되는 것이다 선사의 법문을 듣고 도반간의 탁마를 통해서 인격적으로 성장하는 것이지 무념무상한 삼매에 안주한다고해서 다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알아차림의 대상은 나이고 이 나는 몸과 마음이고 몸은 신체의 몸과 호흡하는 몸 마음은 수상행식인데, 출입식관에서는 몸(身) 느낌(受) 마음(心) 법(法)을 대상으로 관찰한다. 여기서 ‘법’은 몸과 마음의 변화를 ‘무상’으로 자각하는 것과 수행중의 장애와 소득을 알아서 처리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알아차림 사띠(正念)를 가지고 그때그때 알아차림의 대상을 정하는 살핌 삼빠챤냐(正知)의 지시에 따라 외골수로 알아차리면 알아차림은 선정(禪定)으로 발전하고 살핌은 지혜(智慧)로 발전하여 통찰지(通察智)가 계발되는 것이다.

삼매는 마음의 심층에 있는 한생각 이전(意圖)까지 잠입을 하고, 의도를 알아차려 처리하는 것은 통찰지다 화가 일어날 의도를 먼저 포착하여 원천봉쇄(源泉封鎖)하는 원리다. 화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다른 감정들도 마찬가지다.

통찰지는 기존에 축적된 정보로 문제를 해결해가는 판단력 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사띠반야 라고도 한다. 문제를 알아차리는 것을 ‘조견’ 오온 개공이라하고(사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도’ 일체고액이라 한다(반야).

우리야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훌륭한 수행자들이야 무슨 문제를 해결하고 말고가 있으랴 오토매틱으로 자동처리 되는 것이지. 임운자재(任運自在)로 수동태가 되어 소요한다는 정도로 전해오는 말을 들으며 살아왔다.

화두수행과 염불, 위빠사나 모두 삼매에 들지만 중요한 것은 반야인 지혜가 없으면 문제해결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독서, 간경, 문설법 탁마를 통해서 유익한 정보를 축척해 놓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지식이 아니라 지혜다. 지식은 배워서 아는 것이지만 지혜는 지식이 임상을 거쳐서 자기 것이 된 체험적 앎이다. 우리가 어떤 문제에 봉착하여 그 문제를 잘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그 정보가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끝없이 단순 반복을 통해서 끝없이 수행하고 끝없이 배우며 깨달아 가야하는 것이다.

그래서 용심(用心)을 잘하는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최고인격의 경지에 이를 때까지 해야한다.

위빠사나 수행은 마음속에 끄나풀(정보원)을, 사띠(알아차림)를 하나 두는 일이다 탐심이 일어날 때, 화가 일어날 때, 잘못된 판단을 하려고 할 때 끄나풀이 나에게 미리 알려 준다면 사전에 탐 · 진 · 치를 원천봉쇄 하여 저질러놓고 나서 후회(後悔)하는 일이 점차 줄어들 것이다

출입식관 수행의 구체적인 공부는 생소한 용어와 체계가 어려울 수 있지만 알고보면 쉽다. 전문가의 지도를 받아서 점진적으로 해나가야 하지만 일단은 차 마시면서 일상으로 하던 이야기를 편하게 하여 본다. 대충하는 이야기 같아도 뼈다귀가 있는 말이라는 점을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불교는 인격을 수양하는 가르침이다. 그렇게 수행불교로 들어가면 복은 자연히 짓게 되고 또 복의 결실을 일상의 사소한 일들 속에서 누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믿는 정법불교요, 우리가 다음세대에 전승해야할 불교인 것이다.

                                                          

 

도현 스님은
범어사 덕명 스님을 은사로 1963년 부산 범어사에서 입산 출가했다. 1965년 동산 스님에게 사미계를, 1972년 범어사에서 석암 스님에게 비구계를 받았다. 제방선원에서 30여년간 정진했으며 태국에서 5년 동안 위빠사나 수행을 체득한 스님은 현재 지리산 연암 토굴에서 홀로 수행자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저서로는 ‘조용한 행복’, ‘나라고 불리어지는 것에 대한 알아차림’ 등이 있다.

저작권자 © e붓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