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량 풍경은 그날의 날씨에 따라 달라진다. 비가 오는 날에는 기와에서 떨어지는 빗줄기의 청음이 반갑고, 맑은 날에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누비는 풍경의 물고기가 눈에 들어온다. 진해 성흥사(회주 영환 스님)를 찾은 날, 이른 아침이라 도량엔 안개가 자욱하다. 희미한 지붕은 돛을 올린 배와 같고 처마 밑 용머리는 뱃머리와 닮았다. 안개 낀 도량에서 반야용선 만나는 행운을 얻은 건 비단 눈이 주는 착각 때문만은 아니리라 생각했다.

 

성흥사는 흥덕왕 8년에 무염 국사가 창건한 호국사찰이다. 신라 흥덕왕 초년에 웅동과 제포 일대에 왜구가 자주 출몰하여 왕의 근심이 가실 날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왕의 꿈에 신선이 나타나 말하기를 무염 스님을 불모산에 모셔 오라 했다. 왕은 지리산에서 수행 중이던 무염을 모셔 와 왜구를 멸해 주길 간청했다.

무염 국사는 불모산 철마봉에 올라가 금으로 된 석장을 고갯마루에 꽂고 왼손으로 배를 두드렸는데, 그 소리가 마치 포성처럼 진동하였다. 그때 갑자기 금갑을 두른 신장이 나타나 산을 둘러싸니 왜구가 놀라 두려움에 떨며 도망갔다. 이에 왕이 크게 기뻐하며 무염에게 재물과 전답을 시주하여 구천동 관남리에 터를 골라 절을 짓게 하였는데, 이것이 성흥사의 시초다.

성흥사는 창건 당시 500여 명의 승려가 머물 정도로 대찰이었는데, 창건 후 두 번의 큰 화재로 인해 두 번 자리를 옮기며 지금의 자리에 터를 잡게 되었다. 무염 국사는 구산선문 중 성주산문의 개산조가 되었는데 무염 국사가 창건한 사찰의 이름에 대부분 ‘성’ 자가 붙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성흥사는 꽤 오랜 시간 동안 큰 규모의 사격을 유지하였으나 근대에 들어 폐사지에 가까울 정도로 규모가 줄어들었다.

성흥사 회주이신 영환 스님이 처음 성흥사를 찾았을 때의 모습은 그야말로 암담했다. 스님께서 1975년에 폐사지 관리 담당으로 왔을 때 대웅전은 쓰러져 가고 있었으며 법당의 문짝은 너덜너덜해져 문의 구실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화장실 옆에는 소가 묶여 있었고 잡풀이 무성하게 자라나 성흥사의 과거는 찾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지금은 길이 잘 닦였는데, 예전엔 웬만한 차로는 올라오지도 못했어. 그래서 사륜 구동 차를 끌고 여기까지 올라왔지. 도착해서 절을 보니 엉망이었는데, 또 자세히 들여다보니까 폐사가 될 만한 절은 아니었어. 다시 살려내면 이곳이야말로 제대로 된 절이 되겠다 싶었지.”

스님이 주지로서 성흥사로 돌아온 건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나서였다. 그간 여러 스님이 다녀가며 가람의 모습을 점차 갖추기는 했지만 역사 속의 성흥사를 떠올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스님은 대웅전 불사부터 시작했다. 대웅전 뒤편의 산비탈을 밀어내 산사태의 위험에 노출된 법당을 보호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리고 대웅전 보수를 시작했지만 그 역시 처음에는 녹록지 않았다.

“처음엔 보수하려고 사람을 불렀는데, 그냥 보수가 아니라 전부 다 해체해서 다시 세워야 할 정도였어. 서까래가 다 썩어서 나무도 쓸만한 게 하나도 없었지. 새로 짓다시피 해서 지금 대웅전 불사를 마무리 지었어. 시골 창고처럼 허술하게 만들어져 있던 범종루도 2층으로 새로 지었어.”

그렇게 하나하나 불사를 시작하여 정갈하고 단정한 가람의 모습을 갖추었다. 푸른 잔디와 손수 심은 조경수의 조화는 안온함을 안겨 준다. “도량을 잘 가꾸어 놓는 것은 부처님을 잘 예경하는 것과 같다.”는 스님의 말씀처럼 곳곳에는 스님의 정성 어린 손길이 닿아 있다. 매일 새벽 포행에 나서면서 도량을 한 바퀴 돌아보는 일은 스님의 중요한 일과이기도 하다.

성흥사 양쪽 담벼락에는 키 큰 편백나무 여러 그루가 자리 잡고 있다. 성흥사를 찾는 이들이 편백의 향기를 맡으며 조금이나마 몸과 마음이 치유되길 바라며 심은 것이다. 당신의 건강이 편치 않으심에도 늘 신도들을 향해서 더 마음을 내신다. 그래서 여전히 법상에 올라 신도들에게 공부와 수행을 놓지 않을 것을 당부하신다.

“요즘 절에 다니는 신도들은 하나도 얻은 것도 없으면서 얻었다는 착각에 빠져 있어. 얻음이라는 건 스님들도 어려운 일이야. 깨닫기가 오죽 어려우면 매 안거마다 선방에 들고 나기를 반복하며 공부를 하겠어. 다들 확철대오하려고 공부를 하는 거야. 신도들이든 사문이든 그 어려운 걸 해내려고 공부하고 수행한다는 걸 늘 주지하고 있어야 해.”

 

특별히 스님은 성철 스님과의 일화를 들려주며 사문의 도리에 대해 강조하셨다. “성철 스님이 열반하시기 전에 범어사에 오셔서 큰스님 부도탑을 둘러보고 가셨지. 성철 스님은 새벽에 기도하시고 저녁에 주무실 때도 기도하시고, 늘 기도를 하셨어. 그리고 대중들과도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 주셨지. 사문이라 함은 그렇듯 기도하고 화합하는 데에 도리가 있어.”

현재 성흥사에는 대웅전을 비롯해 나한전, 삼성각, 범종루, 일주문, 요사채 등이 있다. 특히 나한전은 배명인 전 법무부 장관이 머무르며 사법고시를 준비해 합격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인지 나한전을 찾아 합격기도를 올리는 불자들이 많다. 성흥사의 신행단체는 조금 특별하다. 관음회, 지장회, 불교대학은 각각 ‘절 경력’에 따라 나뉜다. 젊은 초심자는 불교대학에서부터 시작해서, 절에 다닌 햇수가 늘어나면 지장회로 승격되고, 또 햇수가 늘어나면 관음회 회원이 될 수 있다. “절에 가장 많이 오는 사람이 가장 행복하다.”는 성흥사만의 기준이 만들어 낸 재미있는 구조다.

불모의 품에 안겨 있는 성흥사는 아주 오랜 시간 제 빛을 잃고 있었다. 그러나 근래에 거듭된 불사를 통해 맑고 깨끗한 도량이 완성됐다. “문화재 사찰로서 전통을 고수하고 자연을 보존하는 것이 성흥사가 지향하는 방향”이라는 스님의 말씀처럼 불모의 품안에서 과거의 영화로운 기백을 펼쳐 보일 예경의 도량 성흥사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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