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1년 부산 미타선원 금강경 산림법회 2재 법문
행복禪수행학교 교장 월암스님

 

  •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 일체 살아가는 중생의 살림살이가 꿈과 같고 헛깨비와 같고 물거품과 같고
  • 그림자와 같으며 또한 이슬과 같고 번갯불과 같다.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라.

이것이 금강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일러주는 부처님의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꿈 가운데 꿈을 꾸고 꿈을 해몽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옛날 어떤 사람이 사공스님을 찾아와서 묻기를 "사람이 태어나서 살다가 죽게 되는데, 태어날 때 어디로 왔으며 죽어서 어디로 갑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사공스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어떤 사람이 꿈을 꿀 때 꿈속에 일어나는 일들이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것인가? 꿈속에서 봤을 때는 실로 꿈속의 일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꿈을 깨고 난 뒤에 그 꿈속의 일은 어디로 갔는가? 꿈을 깨고 난 뒤에는 그 꿈속의 일이 실로 있다고 말할 수 없더라. 실로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꿈 가운데 일이요, 실로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꿈을 깨고 난 뒤의 일이다."

금일 미타선원 법회에 참석한 선지식 여러분, 여러분은 꿈 가운데 계십니까, 꿈을 깨고 계십니까? 아직 꿈속에 있다고 한다면 실로 없다고 할 수 없으니 희로애락이 교차할 것이며 지금 꿈을 깨고 있다고 한다면 근심과 걱정이 나를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합니다. 변하는 것이 진리인데 중생은 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부처님께서는 바라는 것이 있으면 중생이요. 바라는 것이 없으면 부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부족합니까? 돈이 부족합니까, 집이 부족합니까, 욕심이 부족합니까? 무엇을 바라고 있습니까? 육조스님께서는 지족이 가장 큰 행복이라 했습니다. 만족할 줄 아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나보다 가진 것이 많고 지위가 높아 내가 더 바라고 그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욕망한다면 그것은 욕심입니다. 그것은 마음속에 끊임없이 모습을 지워가는 것입니다. 상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내가 스스로 짓고 스스로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더 받으려 하면 더 열심히 지으면 될 것이며 내가 지은 것에 대해서 지금 받는 것이니 만족하고 사는 것이, 그러면서 한편으로 열심히 씨를 뿌리면서 노력하는 것이 올바른 행복의 길이 아닌가 생각을 해봅니다.

금강경에서 설하고 있는 대의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요약하면 "아집과 법집을 파하고 상이 공한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용성스님께서는 아상에 갇혀있는 것이 아집이라고 일러주셨습니다. 나라는 모양, 나라는 상이 있기 때문에 몸도 내가 아니란 말입니다. 이 몸이라는 것은 지수화풍, 사대요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마음이라는 것도 내가 아닙니다. 내 마음이라고 말하지만 이 마음 또한 수상행식입니다. 수상행식으로 이루어진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그림자에 속아 끊임없이 분별합니다. 몸도 마음도 내 것이 아니라고 하면 무엇이 나입니까. 저 허공은 노래를 부를 줄도 들을 줄도 모릅니다. 저 허공은 노래를 부를 줄도 들을 줄도 모르는데 우리의 몸 또한 노래를 부를 줄도 들을 줄도 모른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들어서 노래를 부르고 들을 줄 아는 것입니까?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몸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라고 한다면 무엇이 나의 본래면목이며 무엇이 나의 참나입니까? 참나가 아닌 거짓 나로서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음에 휩싸여있는 거짓의 나로서 끊임없이 욕망을 추구한다고 한다면 이것이 아집이라고 합니다. 나라고 할 것이 그 어디에도 없다는 말입니다. 몸도 마음도 그 어디에도 나를 찾을 수 없는데 우린 나라는 것을 세워놓고 거기에 끼워맞추고 있습니다. 기쁨, 슬픔 등 나라는 가상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끼워맞추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아집 속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부처님께서는 아상이라고 이르셨습니다. 나라는 상, 내가 아닌 상은 전부 남입니다. 그것을 인상이라고 합니다. 나라는 울타리를 쳐놓고 울타리 안의 것은 난데 울타리 밖은 남입니다. 남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인상이라 합니다. 대나무 소쿠리를 바닷물에 띄우면 소쿠리 안에 물이 들어옵니다. 소쿠리 안에 들어온 물만 나입니다. 그러나 바닷물이 어찌 소쿠리 안에 들어만 있는 물이 나의 물이겠습니까. 바닷물 전체가 나의 것이지요. 중생은 대나무 소쿠리를 만들어놓고 그 속에 있는 것만이 '나다, 그 밖에 있는 것은 남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부 바닷물인데 말입니다. 그러니 아상이 있으면 인상이 있습니다. 본래 소쿠리 안의 물이나 밖의 물이나 같은 바닷물입니다. 너와 내가 다를 바가 없는데 소쿠리라는 상을, 아집을 만들어놓고 그렇게 여기고 있다는 말입니다. 아상과 인상을 끊임없이 연출하고 있는 겁니다. 나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너그럽지 못하고 그래서 끊임없이 좋다, 싫다를 반복하며 취하고 버리고 바깥 경계에 대해서 이 마음을 돌이키지 않는 것이 이것이 중생의 놀음입니다. 그래서 중생상이 생기는 것입니다. 좋다, 싫다 하는 것이 전부 마음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인데 그 그림자를 붙잡고 평생 울고 웃다 세월을 다 보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리석은 중생상의 모습입니다.

수자상까지 이 네 가지 상을 떨쳐버리고 공한 줄 알아야 하는데, 아상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아집을 파하면 해결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네 가지 상 가운데 상을 떨치지 못하면 그건 보살이 아닙니다. 금강경에 해당되는 사람이 아닙니다. 금강경의 시작이 어떻게 됩니까? 선남자 선여인이 어떻게 살 것이며 어떻게 그 마음을 수행하느냐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낸 사람들입니다. 그는 이미 보살입니다. 그런데 뒷 구절에 나오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다면 보살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보살입니까, 비보살입니까? 여러분은 보살로서 앉아있는 겁니다. 이곳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낸 선남자 선여인, 결국 보살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보살이 보살이라고 한다면 4상을 떨쳐버렸다는 말입니다. 네 가지 상을 떨쳐버렸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절에 오고 기도, 수행, 참선,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절에 열심히 다니는 사람은 4상에 하나가 더 붙습니다. 묵은지상, 중상, 수좌상, 참선상이 붙지요. 그렇게 상을 덕지덕지 갖다 붙입니다.

아집과 법집을 파하라고 했지요. 실로 나라고 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없는 법집, 아집을 부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각 경계에서 다가오는 일체 모든 그것이 모두 공하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신상, 심상 일체 경계 상이 공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금강경의 대의입니다. 육조단경에서 혜능스님이 무상이 무엇이냐 물었을 때 그 대답이 "상 가운데 이때에 상을 떠나는 것이다."라고 답했습니다. 상을 떠나 중생이 살 수 있습니까? 우리는 상으로 살고 있습니다. 몸의 상으로 살고 있고 마음, 심상을 만들고 있다는 겁니다. 미운놈, 기쁜놈, 슬픈놈, 괴로운놈 경계를 따라 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상을 만들었으면 상에 끄달리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이를 법집이라 합니다. 누가 나에게 욕을 하면 내 마음에 기분 나쁜 상을 만들어 싸우게 됩니다. 일체 상이 공한 그 가운데에서 상을 벗어나면, 욕심 가운데 욕심을 버린다는 말입니다. 그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우리는 무상이라고 봅니다. 온 몸으로 온 마음으로 금강경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금강경의 큰 대요, 큰 요점에 대해 용성 선사께서 말씀하시길 "무상으로 종지를 삼고 무주를 체로 삼아 묘행으로 용을 삼아라."고 하셨습니다. 종지라는 것은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라 합니다. 부처님과 역대 조사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마음 가운데 상이 일거들랑 분별 상이 일거들랑 그것을 잘 분별해라. 마음의 경계 상이 일거들랑 선분별해라." 첫째는 잘 분별하고 동시에 그 분별을 따라가지 말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떠오르는 느낌을 첫 번째 화살이라 합니다. 이어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화살을 맞으며 고슴도치가 되어버립니다. 즐겁다, 괴롭다는 느낌이 항상 있습니다. 그 느낌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내버려두면 두 번째 화살이 됩니다. 좋으면 취하고 싫으면 버리게 되는데 이것이 세 번째 화살입니다. 세 번째 화살까지 맞으면 고슴도치가 되어버리지요. 그래서 생각의 분별상이 일거들랑 잘 분별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항상 부처님의 법을 공부하고 법에 의거해서 생활하라고 말씀하신신 겁니다. 그렇게 잘 분별하고 분별을 따라가지 말라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분별을 따라 다니느라 바쁘지요. 꿈속에서 꿈을 꿀 때 끊임없이 꿈의 경계를 쫒아갑니다. 분별을 잘 알아차리고 그렇게 살아야만이 해탈에 이를 수 있습니다. 무상이라는 것은 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상 가운데 상을 떨치고 벗어나는 것입니다. 금강경에서는 이 무상을 종지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승 경전에는 중생이 본래 부처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자리가 빛입니다. 그 빛이 작용을 할 때 밝음과 어두음으로 나타나기에 빛이 없으면 그림자가 없듯이 밝음이 없으면 어두움도 없습니다. 부처가 없으면 중생이 없듯이, 밝음과 어두움은 하나입니다. 십이연기의 무명 또한 밝음에서 나오듯 중생도 부처에서 나온 것이지요. 빛의 참나가 한 생각을 일으키면 그 생각에 미혹되어 어둠이 됩니다. 어두움과 밝음이 하나임을 모르고 어두움에 집착해 버리면 중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생각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 생각을 빛으로 돌이키느냐 어두운 경계를 따라 가느냐에 따라 부처와 중생으로 나누어지는 것이지요. 한 생각이 공한 것을 알아차리면 어두움을 향해 따라가지 않을 텐데 그것을 모르고 탐진치 삼독의 중생 살림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그 생각에 머무르지 말고 집착하지 않아야 합니다. 생각을 내는 순간 아집이 되고 법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응무소주하고 이생기심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육조 혜능스님이 말씀하신 무주는 한 생각을 일으키되 그 생각에 집착하면 중생이고 그 생각이 공한 줄 알면 부처가 되기에 육조단경에서 우리의 수행이 일념수행이라 이르는 것입니다. 꿈인 줄 모르고 꿈을 꾸면 괴롭습니다. 꿈속에 강도에게 칼을 쥐게 하고 겁박하는 것도 나이고 칼 앞에서 쩔쩔매는 것도 나입니다. 꿈인 줄 알면 두렵지 않은데, 꿈인 줄 모르니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있습니다. 꿈인 줄 알고 꾸는 꿈은 바로 바라밀행으로 이어집니다.

금강경에서 수보리가 “희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라고 했는데 무엇이 희유한 것일까요? 일체 중생이 탐, 진, 치 삼독에 있지만 금강진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희유한 것이고, 가장 견고하고 예리한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고 희유하다고 하였고 잃어버린 불성이지만 다시 찾을 수 있다는 것이 또한 희유한 것입니다. 수보리가 부처님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모든 중생을 멸도시킨 후에도 여래는 한 중생도 제도한 바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금강경의 묘미입니다. 멸도했지만 본래 부처인데 제도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중생을 제도한다는 것은 모든 이가 본래 부처라는 말에 위반되는 것입니다. 모든 중생이 본래 부처인데 무엇을 멸도시킬 일입니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중생의 입장에서는 머문 바 없이 보시를 해야 하고 머문 바 없이 육바라밀의 묘행을 해야 합니다. 그중 인욕바라밀과 무주상 보시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무주상 보시는 희사와 반토로 하는 보시가 되어야 합니다. 인욕바라밀은 참을 것이 없는 것으로 어떤 악 경계가 오더라도 끄달리지 않음입니다.

금강경에서 어떻게 살고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의 물음은 결국 ‘어떻게 안심할 것인가?’입니다.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면 안심법입니다.

본지는 오는 9월까지 미타선원에서 봉행하는 <금강경 산림법회> 초청 법사 스님들의 법문을 매주 연재합니다. 불자들의 신행의 기본이 되는 경전인 금강경을 주제로 한 스님들의 법문을 통해 올바른 수행과 삶의 지혜를 전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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