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떤 마음을 품고 세속을 떠나 출가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의 목표물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했다고 하면 설사 길이 멀고 험하다 하더라도 허덕거리지 않고 꾸준히 목표물을 향해서 가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목표물이 보이지 않으면 목표에 다다랐다 하더라도 목표에 가까이 온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허둥지둥하기 마련입니다. 내가 이렇듯 부지런히 걷고 걸었는데,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면 의심이 끊임없이 일어나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 수행자가 도를 닦는 것은 마치 길을 닦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동쪽으로 가는지 서쪽으로 가는지 목표를 확실히 알고 있으면 목표에 가까워질수록 일체 의심이 사라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자는 수행의 목표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도를 닦기 위해서, 불법을 알기 위해서 수행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불법이다, 도다, 진리다 하는 것은 어디에 있는가. 불법을 깨달은 사람을 찾아가 어디에 있는지 대답해 달라고 하면 “마음 밖에 부처가 없고 마음 밖에 도가 없고 마음 밖에 진리가 없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면 마음 밖에 없다고 하면 마음이 곧 불법이요, 도요, 진리인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것을 찾기 위해 동쪽이고 서쪽이고 바깥을 향해 돌고 있느냔 말입니다. 마음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도니 진리니 하는 것은 나와 관련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마음은 각자 스스로가 갖고 있으니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 마음이 어떤 건지를 생각해봅시다. 깨달았다고 특별한 것이 있고 깨닫지 못했다고 마음이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깨쳐도 자기의 마음이고, 깨닫지 못해도 결국엔 자기 마음입니다. 다만 깨닫고 깨닫지 못하고의 차이가 하늘과 땅만큼 큽니다. 깨달은 사람은 의심이 없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행을 하고 온갖 공덕을 쌓았다고 해도 내가 하는 것이 바른 것인지에 대한 의심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항상 답답한 겁니다. 같이 식사를 해도 한쪽에서는 지극히 편안한 마음으로 밥을 먹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같은 밥을 먹어도 마음이 답답하고 편하질 않습니다. 내가 알고자 하는 근본 의심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대가 알고 싶은 게 도대체 무엇이냐. 도니 진리니 하는 것은 객관적인 이름일 뿐이고 마음이 곧 도요, 진리요, 불법이 아니겠느냐 말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하나 깨닫기 위해서 선방에 들어가서 선사를 찾고 화두도 얻어서 관합니다. 또 혹자는 염불도 하고 기도도 하고 주력도 하고 있습니다. 불법에 들고 보니 경전도 많이 읽고 생각도 많이 하고 각자의 근기에 맞게 수행도 합니다. 수행하는 방법은 근기에 따라 다릅니다. 그러면 무엇을 얻기 위해 염불, 기도, 주력 등 각각의 근기에 맞춰 수행을 하는 것입니까. 혹자는 선은 최상근기를 가진 사람이 하는 것이고, 중하근기는 복짓기를 한다고 합니다. 최상근기만 선을 하는가, 그것은 또 아닙니다. 선만큼 쉬운 것은 없습니다. 간화선과 묵조선은 어려운 말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결국 간화를 통해 선을 하고 묵조를 통해 선을 하는 것입니다. 선가귀감에 보면 서산대사께서 ‘선시불심(禪是佛心) 교시불어(敎是佛語) 율시불행(律是佛行)’이라 하셨습니다.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또 율은 부처님의 행동입니다. 불심은 개개인이 자기 본연의 마음이며 모든 망상 분별과 산란한 생각이 사라진 것입니다. 선심(善心)이든 악심(惡心)이든 모습은 다르지만 모두 한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일어난 근본의 마음이 본래면목이라 하고 본래심이라 하고 진리라 하고 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깨닫지 못해서 그렇지 본래심은 다 있습니다. 우리가 괴로울 때 생각에 좇아가지 말고 생각 일어난 그놈을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근원으로 돌아가는데 온갖 장애물이 많습니다. 감정, 욕심, 산란심 그리고 혼침이라는 장애들의 이전에는 본래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본래심을 가리고 있는 산란심과 혼침을 지우기 위해 끊임없이 수행하는 것입니다.

깨달은 이를 찾아가서 어떻게 깨달았는지 솔직하게 거짓 없이 꾸밈없이 알려달라고 하면, “나는 종소리 듣고 깨달았다.”, “나는 목탁소리 듣고 깨달았다.”, “나는 시장에서 아이들이 노는 소리를 듣고 깨달았다.”고 합니다. 아이들 노는 소리를 듣고 깨쳤다면 바로 그 소리가 무상법문이 되는 것입니다. 무상법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종소리를 듣고 깨달았다? 깨달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때까지 듣고 있으면서 깨닫지 못했는데, 어떻게 갑자기 깨닫게 되었느냐고 물어볼 수 있습니다. 깨달은 사람의 입장에서 되물을 수도 있습니다. “당신도 종소리, 목탁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네 그렇습니다. 똑같이 귀에 듣고 있습니다. 다만 듣는 것에 온갖 생각을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온갖 생각이 있어도 듣기는 잘 듣지만 확실한 소리를 접하지는 못합니다. 확실한 소리를 듣고자 하면 그것을 보지 못하게 하고 있는 마음속의 장애를 털어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저절로 진실한 소리가 내 귀에 들어올 것입니다. 깨달은 자가 말하길 “나도 조금 전에 자네들과 고민도 하고 생각도 많이 했지만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도 없고 나아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조용히 앉아 있다가 새벽 예불이 되어서 종소리를 들었는데 나도 모르게 소리 지르고 싶을 정도로 놀랐다. 내가 찾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종소리를 듣는 것은 누구나 똑같다는 말입니다. 다만 생각을 품고 종소리를 듣는 것과 생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갑자기 종소리를 들으니, 그것밖에 없더라는 겁니다. 이는 새롭게 찾았다고 해서 얻은 것이라고 할 수 없고 마음속에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얻었다고는 하지만 얻었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본래 얻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벽을 보고 좌선하여 면벽관심(面壁觀心)하고 있을 때, 벽에서 내 마음이 나옵니까? 종소리는 ‘나’가 아닙니다. 종소리가 날 때 소리인줄을 알고 듣고 있는 것이 ‘나’입니다. 종소리가 생겼다고 해서 ‘나’가 생기고, 사라졌다고 해서 ‘나’가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벽이 눈앞에 있으면 눈앞에 있는 줄을 알지만 벽이 사라져도 ‘나’는 그대로인 것입니다. 상대가 있든지 없든지 ‘나’가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불법을 깨닫겠다는 생각이 마음을 가리면 종소리도 못 듣고 벽도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고 기진맥진한 그 순간 탁 들었을 때 순간적으로 소리와 물체가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 선사가 마음을 비우라, 생각에 사로잡히지 말라 했던 것입니다. 마음속에서 마음을 찾는 것은 물고기가 물 속에서 물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깨닫지 못해도 자기 마음이고 깨달았다면 답답했던 것이 시원하게 뚫리는 것입니다. 가리고 있던 것이 사라지고 시원해지면 목전에 있습니다. 선은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외우는 것도 아닙니다. 눈을 뜨고 가만히 앉아있으면서 소리가 나면 소리를 듣고, 물체가 앞에 있으면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처럼 쉬운 것이 없습니다. 다른 것은 관하고 외워야 하는데 선은 쉽게 지켜보기만 하면 됩니다. “지켜보기만 하면 깨달아집니까?”하고 물어보면 선사는 “어허. 나는 이미 깨달았다 보고 있는 게 나 인줄 알았기 때문에 깨달았다” 하는 것입니다. 물론 방법은 쉬워도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가만히 벽만 바라보기를 5분, 10분하다보면 금세 졸리고 온갖 생각이 일어납니다. 그러다보면 자기 목전에 보이던 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것이 혼침과 산란입니다. 온갖 혼침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또렷이 목전에 서서 지켜보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어느 시기에 가면 지켜볼 필요도 없습니다, 지켜본다고 해서 자기 마음이고 지켜보지 않는다고 해서 자기 마음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알지 못하고 수행하면 아무리 수행해도 헛수고인지라 피곤할 뿐입니다. 마음을 알고 염불하고 기도하고 주력하든 선행공덕을 짓든지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마음에 도사리고 있던 혼침을 삭 녹일 수 있습니다.

자성에 요달한 사람은 목표물을 보았기 때문에 고민과 의심이 없습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내가 아무리 건강해도 근본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불안합니다. 깨달음을 얻는 순간 의심의 뿌리가 없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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