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갠지스강

일출을 보기 위해 이른 새벽 갠지스강으로 향했다. 우리가 찾은 곳은 갠지스강의 바라나시 유역이다. 스님의 뒤를 따라 깊은 어둠을 가르며 걸음을 재촉했다. 강 바로 앞에 이를 때까지도 강인지, 길인지 구분 못할 정도로 주변은 어두웠다. 모터를 단 나룻배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얼마지 않아 배가 강의 흐름을 따라 안쪽으로 점차 들어갔다.

여전히 밤이 끝나지 않은 새벽의 풍경.
여전히 밤이 끝나지 않은 새벽의 풍경.

갠지스강은 힌두교인들에게는 어머니의 강이다. 인도인들은 이 강물을 마시고, 목욕을 하고, 빨래를 하며, 삶의 많은 부분을 의지하여 살아간다. 일상 생활에서 뿐만 아니라 자연 이상의 신성스러운 존재로 여기고 있다. 경전에도 늘 등장하는 갠지스강과 항하사에 관한 이야기는 언제나 상상속에 머물렀던 광경이었다.

배를 띄운 곳에는 시바신을 그린 큰 벽화가 있다. 힌두교의 신인 시바신은 부처님 사후에 힌두교가 번성하며 생겨난 신이다. 비슈누, 브라흐마와 함께 힌두교의 3대 신 중 하나다. 이곳 갠지스강은 시바신의 머리에서부터 흘러나온 물이 강이 됐다 하여 더욱 신성시 되고 있는 것이다.

전혀 자비롭지 않아 보이는 이 파괴의 신은 파괴하지 못할 것이 없기 때문에 우주 최고의 힘을 가졌다고 한다. 갠지스강이 범람하여 수만의 목숨을 앗아가거나, 물이 말라 또 생명을 앗아간다고 생각하면 대자연에 대한 두려움과 시바가 동일한 존재로 인식되게 된다.

인도 사람들의 일상은 갠지스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갠지스강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은 이들의 일상이자 신성이다.

 

강 쪽에서 육지를 바라본다. 점점 밝아오는 여명에 조금 전 어둠에 가려졌던 맨살이 드러난다. 강을 따라 시장이나 빨래터처럼 살아있는 풍경과 함께 죽음의 의식을 거행하는 화장터도 마주한다. 시체를 화장하는 것은 영혼을 정화하는 의식으로 여겨진다. 화장터의 불은 2천년 동안 단 한 번도 꺼진 적이 없는데, 이 불씨를 나무에 붙여 화장하면 시바신의 곁으로 갈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그래서 이곳의 불은 끊임없이 육신을 태우고, 강물은 재를 받아들인다.

단 영혼을 정화할 필요가 없는 수행자나 아이, 임산부의 시신은 그냥 물에 흘려보낸다. 특히 수행자들은 죽음을 앞두고 이곳을 찾아 강물에 몸을 던진다고 한다. 죽음에 이르러 생의 출발지로 돌아가는 길. 어머니의 품에서 나와 다시 돌아가는 건, 이들의 입장에서 당연한 일이다.

배가 모래톱 위에 정박했다.

 

“부처님 말씀에 항하사 모래수보다도 우주 법계가 광대하다고 하셨으니, 이 우주가 얼마나 큰 지 그걸 보신 겁니다.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모래알 수만 해도 굉장한데 부처님께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까지 보셨으니, 오늘날 우리가 부처님 말씀하신 것을 증명하려면 부처님처럼 눈을 떠야하지 않겠습니까. 갠지스강의 신화나 이야기에 연연할 필요는 없지만, 해가 늘 같은 곳에서 뜨고 지듯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어떤 의미를 부여해 삶의 질을 높이는 수단으로 삼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 정신적인 세계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니 말로 다 설명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겁니다.”
- 수불 스님

 

경전에서 보았던 항하사 위에 발을 디뎠다. 항하사 위에 일렬로 앉은 스님과 불자들이 수평선을 마주한다. 붉고 선명한 태양이 모래를 물들이며 눈 속으로 들어온다. 보석같이 찬란하게 빛을 받은 항하사 모래도 아침 풍경에 보태어진다.

항하사 모래톱 위에서의 일출.
항하사 모래톱 위에서의 일출.
항하사에서 바라본 강 건너편의 풍경.
항하사에서 바라본 강 건너편의 풍경.

부처님께서도 매일, 해가 뜨고 지는 것을 지켜보셨을 것이다. 오늘의 태양은 과거 언젠가 부처님의 법안法眼에 머물렀던 광명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내게 인도 성지순례는 마치 부처님의 자취를 좇아야만 하는 불자의 과업처럼 여겨졌다. 그 생각이 조금씩 바뀌어 가는 중이다. 나는 부처님의 눈이 되어보고 싶다. 남아있는 흔적, 보이는 것 이상의 것을 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고 있다. 부처님은 왜 인도에서 깨달음을 얻고, 법을 전했으며, 열반에 드셨던걸까. 부처님은 무엇을 보셨던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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