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산 큰스님은 생전에 범어사의 수행 가풍은 물론이거니와 조계종의 정화에 일신을 헌사한 분이다. 그렇기에 뒤를 이어 제자들이 일군 동산 문도는 곧 범어사의 가풍이요, 조계종풍의 상징이다. 큰스님이 세연을 다한 지 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성성한 스승의 목소리, 벼락같은 일갈은 후학들의 죽비가 되고 있다.

“흥교야, 중노릇은 말이다….”

성주사 회주 흥교스님.

강진 백련사에서 스승의 곁에 바투어 앉은 제자는 스님의 한마디 한마디를 놓칠세라 귀를 쫑긋 세웠다. 평생 독신주의, 채식주의, 계율주의를 부르짖으며 한국 불교의 정화를 이끌었던 스님은 틈날 때마다 상좌에게 ‘중노릇 잘 하는 법’을 일러 줬다. 강진 백련사에서 수년을 모셨기에 스님과 나누었던 소소한 농담까지도 상좌의 수십 년 ‘중 생활’이 흐트러짐 없이 이어질 수 있었던 근간이 되었다. 이제는 제자들의 스승으로서 당신의 은사가 일러 주셨던 ‘비법’을 일러주고 계신 흥교스님을 찾아뵀다. 그날은 꽃 그림자가 바닥에 흩어진 화사한 날이었다.

스님은 출가하던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내가 열일곱, 열여덟 때였어. 요즘으로 치면 학원 다니듯이 절에 가서 공부를 했는데 그때 내가 다니던 절이 나주 다보사였어. 다보사 선방에 고암스님, 지효스님, 전강스님같이 걸출한 스님들이 많이 공부하고 계셨는데, 그 모습을 곁에서 자주 보니 나도 스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탁 들더라고.”

발심이 일어나자마자 고암스님께 출가의 뜻을 밝혔다. 고암스님은 곧바로 “출가를 하려면 중 대장한테 가봐야지.”라며 범어사를 가르쳐 주셨다. 고암스님은 동산스님께 전해 드리라며 손수 편지도 한 통 써 주셨다. 전남 나주에서 부산까지 ‘중 대장’을 찾아 범어사로 향했다. 범어사에 도착했을 무렵은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이었다. 절 문이 어찌나 많은지, 문 몇 개를 지나고서야 대웅전에 다다랐다.

“법당 앞에 누가 노란 옷을 입고 서 있더라고. 그래서 ‘동산스님 뵈러 왔습니다.’ 하니 ‘아 그 스님은 청풍당에 있네. 거기 가 보시게나.’ 하는 거야. 다음날 아침에 보니까 그 스님이 바로 동산스님이었어.” 스님께 절을 올리고 편지를 전해드리자 “부엌에서 불이나 때거라.”는 승낙이 떨어졌다. 사미계를 받는 날 동산스님은 조끼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조각을 꺼내 주셨다. 거기에는 ‘흥교’라는 스님의 법명이 적혀 있었다.

계를 받고 얼마 뒤 오대산 상원사로 떠났다. ‘도통(道通)하겠다.’는 일념이 이끈 구도 길이었다. 참선 공부를 중시하셨던 은사의 가르침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젊은 수좌는 상원사에서 3년간 정진했다. 어느 날 겨울, 젊은 수좌 앞으로 소포가 도착했다. 소포에는 ‘하동산’이라는 글씨가 크게 쓰여 있었다. ‘하동산’이라는 이름 석 자에 선방 스님들이 흠칫 놀라는 기색이었다. 실은 선방에서 막내 수좌라 기죽을 것이 걱정되었던 총무스님(덕명스님)의 기지였다. 소포 안에는 누비 두루마기와 털신이 정성스럽게 들어 있었다. 그만큼 애틋한 정이 있던 시절이었다. 이후 벽송사, 칠불암 등 전국의 선원을 다니며 구도에 박차를 가했다.

스님과 다시 만난 건 강진 백련사에서였다. 백련사를 유독 좋아하셨던 동산스님은 이곳에 머물며 후학들을 지도하셨다. 아직도 잊지 못하는 장면 중 하나는 동네 학자들과 스님이 대화를 나누던 모습이다. 정약용의 유배지인 강진에는 공부깨나 한다던 유학자들이 유독 많았다. 그들이 가끔 구름 같은 도포를 휘날리며 백련사에서 동산스님께 학식을 겨루기 위해 차담을 부탁하던 때가 있었는데, 학자들이 무어라 묻고 무어라 따지든 스님은 망설임 없이 탁탁 대답을 이어나갔다. 차담이 끝난 후에 한참 기가 죽어 터덜터덜 내려가던 학자들의 모습이 우습기도 했는데, 스승의 공부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새삼 깨닫게 해주던 순간이었다. 백련사에 머물던 당시 동산스님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스님은 당신의 계율관을 수시로 가르쳐 주셨고, 청정한 수행자로서의 지남을 일러 주었다.

세월이 지나 다시 범어사를 찾은 것은 재무국장 소임을 맡으면서부터였다. 은사스님은 세연을 다하셨지만, 사형 사제와 도반스님들이 큰스님의 선풍을 올곧게 지키고 있었다. 쌀 세 가마니만 남은 텅 빈 곳간의 재무를 살라니, 앞이 막막했지만 곧바로 스님은 강진으로 향했다. 동산스님과 생전 인연이 있었던 거부를 찾아간 것이다.

“내가 동산스님 상좌라는 것을 아니까 두말없이 쌀을 내 줬지. 다음날 버스를 타고 범어사에 왔는데, 그 며칠 뒤인가 트럭 몇 대가 범어사로 들어왔어. 쌀을 가득 싣고 말이야. 어찌나 쌀이 많은지 1년 치 식량을 한 번에 받았어.”

능력 있는 재무라는 박수가 쏟아졌지만 기실은 은사의 공덕이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스님은 이후로 행정 소임을 두루 맡았다. 성주사 주지로 인연을 맺은 데 이어 범어사 주지로서도 소임을 맡아 동산스님의 승풍을 일신시키는 데 최선을 다했다. 특히 범어사 주지 임기 동안 부산광역시불교연합회의 발전에 힘을 쏟고 부산광역시불교실업인회 창립도 이뤄 냈다. 스님들의 화합, 그리고 불자들의 신심을 증장시키는 일이 가장 중요한 책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대한불교신문을 창간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순수한 신심이야. 그 신심에는 무조건적인 믿음이 있어야 해. 어느 절, 어느 스님을 만나야 신심이 생기는 게 아니라 불교 자체에 신심을 가져야 하는 거야.”

당시에 스님의 행보가 많은 불자들의 호응을 받았던 것도 순수한 신심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라고 스님은 회상했다. 오늘날 불자들이 순수한 신심에서 벗어나는 데에는 스님들의 방심도 한몫했다고 지적했다.

“수행에는 오류가 따르기 마련이야.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수행을 하는 것이지. 우리가 성을 낼 때 계획 없이 갑자기 드러낸단 말이야. 근데 수행이 잘 되면 갑자기 성을 낼 일이 없어. 성 자체가 없어지니까 말이지. 물론 하루 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야. 근데 금생에 못 하면 내생에라도 꼭 하겠다는 마음을 갖는 게 중요해. 수행자 간에도 서로 탁마하고 일러 주면서 다 같이 수행을 해야지 그게 승풍이고, 가풍이 되는 것이지.”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는 옛 이야기가 있다. 그만큼 제자에게는 스승에게 얼씬하지 말라는 뜻으로 들리지만, 다시 돌이켜보면 제자와 거리를 두는 것은 오히려 스승 쪽이다. 당신의 그림자보다 작았던 제자가 후학을 키우는 스승으로 거듭날 때 쯤, 스승은 오히려 제자로부터 한 발 떨어져 묵묵히 지켜보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인터뷰를 마칠 때, 당신의 상좌를 곁에 두고 말씀을 듣는 흥교 스님의 걸음이 한 발 물러서 있다. 이제 노사가 된 제자는 그런 눈으로 후학을 독려하는 스승의 자리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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