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_ 송광사 율주이자 부산 관음사 회주 지현 스님. 어린이 포교, 사회복지재단 운영 등 스님은 부산에서 30여년 간 포교활동을 펼치고 있다. 늘 미소로서 대중과 마주하는 스님에게 질문을 했다. "스님, 행복하신가요?" 스님은 되묻는다. "행복하지 않나요?" 불교를 믿는 사람에게 행복은 너무나 가깝고 친근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행복을 쫓고만 있다. 여름이 시작되는 어느날, 스님과 카페에 마주앉아 행복에 관한 얘기를 나누었다.

   

"과거의 조상으로부터 미래의 자식에게 이어지는 사이에

‘나’가 존재하고, 수많은 가르침 속에서

‘나’가 존재합니다.


‘나’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키, 생김새, 남녀의 성별 등 수없이 나를 규정하는 이름이 있습니다. 그런 이름들이 모여 ‘나’를 이룹니다. 하지만 몸에 붙어있는 이름만 갖고 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나’의 존재를 위해서는 부모님이 있었고, 더 거슬러 올라가 역대 조상들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모든 조상이 곧 ‘나’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다시 또 나는 자식을 낳고 세대를 이어가므로, 조상과 자식 사이에 존재하게 됩니다. 즉 과거의 조상과 미래의 자식, 그리고 ‘나’는 모두 연결돼 있습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수많은 정보를 보고 듣고 배우며 삶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또 내가 아는 어떤 것들을 남에게 가르쳐주고, 또 법문을 들은 내용을 전하기도 합니다. 가르침이 계속해서 전달되는 것입니다. 과거의 가르침이 미래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학교가 있다면 그것을 처음 세운 사람이 있었을 것이고, 그 사람을 통해 내가 학교에서 배움을 얻을 수 있었듯 어떤 사람이 과거에 만든 에너지는 오늘 내게 이어집니다. 그리고 또 누군가에게 다시 이어집니다. 우리는 그러한 인연들 속에 살고 있습니다.

스님에게 행복은 드러난 것이다. 스님의 음성에, 미소에 행복은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
송광사 율주 지현스님에게 행복은 드러난 것이다. 스님의 음성에, 미소에 행복은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

 

과거의 조상으로부터 미래의 자식에게 이어지는 사이에 ‘나’가 존재하고, 수많은 가르침 속에서 ‘나’가 존재합니다. 그러면 ‘나’라는 것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숨쉬지 않고 살 수 있습니까? 죽음은 숨이 끊어진 상태입니다. 공기를 통해 호흡해야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공기가 곧 생명입니다. 그런데 나 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살아 숨쉬는 것들은 공기를 함께 호흡하고 있습니다. 공기가 내 생명이고 모든 생명이 공기를 통해 살아가기 때문에 곧 모든 생명은 ‘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땅이 없으면 살 수 없고, 물, 태양 등 모든 생명이 지수화풍에 의지해서 살아가므로 이들 모두가 내 생명 아닌 것이 없습니다.

마음을 들여다봅시다. 우리가 남이라 부르는 것은 내 인식 속에 모두 존재합니다. 지구 인구가 70억명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내 인식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은하계 밖에 은하계가 존재한다는 것도 마음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존재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옥수수 씨앗을 심어 옥수수가 자라나면, 새로 난 옥수수는 원래의 씨앗과 다른 것일까요? 역사적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의 얘기입니다. 그러면 옥수수를 구성하는 옥수수 알과 옥수수 심, 잎사귀는 옥수수와 같은 것일까요? 이것은 공간적으로 바라본 것입니다. 이 우주의 연기법칙에 대입하자면 결국 모든 우주가 ‘나’라는 것입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우리가 보고들은 모든 정보들은 자신의 인식 속에 존재합니다. 다만 인연을 만나면 드러나고 만나지 못하면 드러나지 못할 뿐 내 마음 속에 있는 것입니다. 결국 내 몸과 마음 밖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無我는 곧 무불아無不我, 결국 나 아님은 없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역사 속에서도, 공간 속에서도 모든 것이 나 아님이 없습니다.

 


“우리는 윤회를 거듭하며

무량한 생명 속에서 늘 부모를 의지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가

내 부모 아닌 이가 없습니다. ”

 


공과 연기를 이해하는 것은 내 마음 속의 미움과 분노를 없애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이해와 사랑, 행복이 생깁니다. 연기법을 이해하면 불행이 사라지고 행복이 찾아옵니다. 자식과 시부모님을 위해 하는 일은 같은 행복감을 주나요? 자식을 위해 하는 일은 즐겁고, 시부모님을 위해 하는 일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자식은 ‘나’라고 생각하지만 시부모님은 ‘남’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모두를 내 자식이다, 내 부모다라고 생각하면 사랑스럽지 않을 사람이 없고 존경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인간의 존경은 그렇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 부모에 대한 분노가 남아있을 수도 있습니다. 가령 어릴 때에 혼났다든지, 심하게 감정이 상했다든지 하는 감정의 잔재가 남아 그렇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이 정말 자식을 미워해서 혼냈을까요?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 옳지 못했을 뿐 미움을 표현하기 위해 야단을 친 건 아닙니다. 아이가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면, 부모는 사정이 안되거나 아이에게 해롭다고 생각해서 사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부모가 나에게 어떻게 했더라도 나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압니다. 혼내는 것 역시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윤회를 거듭하며 무량한 생명 속에서 늘 부모를 의지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가 내 부모 아닌 이가 없습니다. 내 친부모도 나를 가르치기 위해 야단칠 수 있는데, 남들이 나를 이유없이 때리거나 비난한다고 해도 이는 곧 나의 부모가 나를 타이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면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분도 과거전생에 나의 부모였고, 나를 사랑했다는 것을 이해하면 상대에 대한 미움이 사라집니다.

연민심만이 분노를 다스리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은 고통을 원치 않습니다. 상대가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면, 그 역시도 자신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에게 고통을 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를 볼 때 연민심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서 우리는 연민심을 내기 위한 이해의 과정을 생략합니다.

상대가 때리면 더 세게 되갚아줄 생각을 합니다. ‘이해’. 그것은 상대가 과거에 고통을 당했기에 나를 괴롭히게 됨을 아는 것입니다. 상대의 고통을 이해하면 나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됩니다. 길에 누군가 쓰러져 죽어가고 있다면,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119를 부르거나 그를 도와줄 방법을 찾습니다. 설령 그가 나를 괴롭히고 미워하던 사람이라도 그렇습니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을 외면할 수 있습니까? 이 넓은 세상에 내가 미워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불교적인 입장에서는 그 사람도 불성을 가진 사람이고, 여래의 성품을 가진 여래장입니다. 아무리 나를 모질게 괴롭히는 사람이라도 연기를 이해하면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사랑하고, 용서하는 덕목이 생기면서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은 자연스럽게 사라집니다. 이것을 매일매일 명상한다면 더 많은 사람에게 큰 사랑을 베풀 수 있게 됩니다. 이 생각이 잊혀지지 않도록 매일매일 삼보 전에 기도한다면 분명해 질 것입니다.

 


[다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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