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의 독립운동가 ‘만해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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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의 독립운동가 ‘만해 스님’
  • 곽은영 기자
  • 승인 2019.06.05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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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다”
만해 스님(1879.8.29.∼1944.6.29.) (사진=독립기념관)
만해 스님(1879.8.29.∼1944.6.29.) (사진=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만해 한용운(1879.8.29.~1944.6.29.)선생을 2019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만해 스님은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났으며, 1913년 한국불교가 새로운 문명세계에 적응할 수 있는 개혁방안을 제시한 기념비적 책인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발간했다. 이후 스님은 불교의 혁신 운동을 일으킨 주역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됐다.

1919년 종교계를 중심으로 추진된 전국적이며 거족적인 3·1운동 계획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만해 스님은 불교계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탑골공원에서의 만세운동 및 전국적인 만세운동에 적극 동참하도록 권유했다.

1919년 3월 1일 종로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식을 가진 후 모두 일경에게 체포됐으며, 스님은 같은 해 7월 10일 옥중에서 ‘조선독립의 서’라는 논설을 집필해 명쾌한 논리로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의연하게 강조했다.

스님은 1921년 12월 21일 석방된 뒤에도 민족운동을 계속 이어갔다. 1922년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된 물산장려운동을 지원하고 1923년에는 조선민립대학 기성회 상무위원으로 피선돼 활동했다. 물산장려를 통한 민족경제의 육성과 민족교육을 위한 사립대학 건립 운동에도 앞장섰다.

또한, 1927년 2월 좌우합작 민족협동전선으로 신간회(新幹會)의 창설이 추진되자, 만해 스님은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신간회가 창립되자 경성지회장으로 피선돼 민족운동의 최일선에서 활동했다.

1933년 55세가 되던 해, 지금의 성북동 집터에 심우장(尋牛莊)이라는 집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 집을 지을 때 스님을 돕던 인사들이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볕이 잘 드는 남향으로 터를 잡을 것을 권유했으나, 총독부 청사가 보기 싫다며 끝내 동북 방향으로 집을 틀어버리고 말았다는 일화는 스님의 민족적 자존심을 보여준다.

스님은 일제말기 총동원체제 아래 자행된 황민화 정책의 거센 파도 속에서도 민족적 자존심을 꺾지 않았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1940년 창씨개명 반대운동, 1943년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 등을 펼쳤으며, 1944년 6월 29일 그토록 그리던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을 눈앞에 두고 입적했다. 만해 스님의 유해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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