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평소 남의 이야기를 너무 쉽게 입밖에 낼 때가 있습니다. 물론 남 말하는 사람도 문제지만 그 말을 전해주는 사람은 더 나쁜 사람입니다. 우리 중생은 안이비설신의로 색성향미촉법에 대해 늘 사량분별을 합니다. 다시말해 눈으로 대상을 보고 분별하고 귀로 대상을 듣고 분별합니다.대상을 인식하고 그것이 좋고 나쁨과 옳고 그름 등을 늘 생각하여 탐진치심을 내는 것이 우리 중생의 일상입니다. 상을 분별함에 통찰의 힘으로 사유한다면 이런 구조가 부처를 이룰수도 있지만 생은 각자만의 방식으로, 자기만의 업대로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기 때문에
바람이 불어야 꽃이 피고 꽃이 져야 열매를 맺어요.그러니 떨어진 꽃잎 주워들고 울지는 마세요.누군들 한 때는 세상의 부나 명예 그리고 젊음을 갖고자 하지 않았겠어요. 그러나 세월이 가고 나이가 드니 세상의 이야기 보다는 세월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되네요. 이만큼 살아가고 있으니 감사하고 이제 이만큼 살았으니 이해하고 또 이만큼 살았으니 견딜 수 없는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고요.세월이 선생님 같아요. 말없이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이제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겠어요.불지 않으면 바람이 아니고늙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고가지 않으면
“세간의 진리는 무상한지라헷갈려서 어둠 속에 떨어지지 말지로다.”병신년 한 해를 마무리하는 요즘입니다. 나라 안팎으로 뒤숭숭한 일들이 많아 마음으로 여유가 없을 시기인데 서로에게 따뜻한 인사말이라도 건넬 수 있는 따뜻한 달이 되었으면 합니다.‘일일일지(一日一止)’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루에 한 번 멈춰 서면 올바른 인생을 살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쉬어야 할 때 충분히 쉬지 못한다면 힘을 내야 할 때 힘을 내지 못합니다.하루에 한 번은 발을 멈추고 걷는 길을 확인하면서 나아가면 어느덧 자신이 올바른 길을 걸어왔는지
상당 타주장 삼하운(上堂 打柱杖 三下云), 법상에 올라 주장자를 세 번치고 이르시되일보이보 삼사보로 불락좌우전후거(一步二步 三四步로 不落左右前後去) 하라산진수궁무인처에 불로답착본고향(山盡水窮無人處에 不勞踏着本故鄕) 하리라한걸음 두걸음 셋넷걸음으로 유와 무와 망상에 떨어지지 말고 가라. 산이다 하고 물이다 하고 인아사상이 없는 곳?=쳰릿陸像?욕구하사오 위구의식야(時會大衆은 欲求何事오 爲求衣食耶)아위구명리야(爲求名利耶)아 위구재색야(爲求財色耶)아 기운총불(旣云總否)인대위구하사(爲求何事)오 단위삭발(但爲削髮)하고 신착염의(身着染衣)하고자
〔상당(上堂)하시어 주장자(拄杖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고,〕 宗師驗人端的處는等閒開口便知音이라.覿面若無靑白眼이면宗風爭得到今日이리요. 종사(宗師)가 사람을 시험하는 단적처(端的處)는한가로이 입을 엶에 문득 지음(知音)함이로다.바로 면전을 대하여 청백안(靑白眼)이 없으면어찌 종풍(宗風)이 오늘에 이름을 얻으리오. 모든 대중(大衆)들이여!금일(今日)은 丙申年 동안거 결제일(冬安居 結制日)이라.이 삼동구순(三冬九旬)의 결제기간동안 대중들이 모인 것은
불교의 가장 긍극은 이 모든 것이 내가 마음속으로 만들어 낸 환영임을 깨달아 이고득락(離苦得樂), 즉 고통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찾아가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이 실체하지 않음을 내가 몸소 경험하고 알아가는 과정이 바로 우리의 삶입니다. '이것보다 저게 더 행복할 것 같아.' 라고 자기합리화를 해서 또 다른 대상을 구하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고 본래 행복도 없었다는 걸 알아 가는 거죠. 그러나 우리는 알기가 어렵습니다. 스스로 알려고 하지 않고 알기를 거부합니다. 내가 애써 구한 것에 대한 집착과 없는 행복을 구했다는
화창한 가을 날씨입니다.매일 오전 10시가 되면 법당에서는 목탁 소리가 나고 스님의 염불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미타선원은 용두산에서도 용머리에 해수관세음보살을 모시고 늘 염불을 하는 수행도량입니다. 부산에 해수관음도량이 많이 있지만 부산의 심장인 이곳 용의 머리에 관세음보살님이 서 계신 도량은 그 가운데 귀한 도량이라 할 것입니다.이곳은 400년 전부터 변재천사라는 이름으로 해수관음을 모신 곳입니다. 한동안 절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다가 관음도량으로 가꾸어 나간 것이 이제 내년이면 20년이 되어 갑니다. 이곳에 어머님의 왕생극
고뇌했습니다. 출가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그리고 다시 고민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출가의 정신을 살리는 것인가를. 많은 시간 본분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했습니다. 마지막 번뇌의 끈을 놓지 못해 힘들어했습니다. 부처님보다는 눈에 보이는 세속의 조건에 더 의지했던 것 같습니다. 못난 중생심만 키웠던 것입니다. 그렇게 보낸 세월을 안고 모든 것 부처님께 바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제 참 편안합니다. 마냥 가볍고 자유롭습니다.먼저 지극한 신심을 바칩니다. 출가하고 어언 세 번의 강산이 바뀌는 것 같습니다.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본
아픈 사람의 얼굴은 하나같이 찡그리고 있고 힘들어 보입니다. 아픈 사람의 말은 짜증이 석여 있고, 마음은 의욕이나 열정이 없습니다. 아픈 사람의 몸은 통증 때문에 움직이기 어려워 게으릅니다. 이렇게 아픈 사람과 함께 있는 사람은 신경쓰이는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아픔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남까지 아프게 합니다. 아픈 사람이 때론 남을 돕고 싶어서 보시나 봉사를 할 때도 있습니다만 좋은 일한다고 하다가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이런 이유 때문에 가장 남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은 자신의 마음이 자비롭
부지런히 정진하면모든 일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니너희들은 마땅히 정진하라.마치 작은 물도 쉬지 않고 흐르면큰 바위를 능히 뚫을 수 있는 것과 같으니라.현대를 살아가는, 더구나 도시의 삶은 건조하고 팍팍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잠시 자신을 위해 여유를 부릴 시간 없이 다들 바쁘게 움직이기 때문입니다.설령 잠깐의 여유로운 시간이 생기더라도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오히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자신을 견디지 못하고 불안해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을 하는 것도 행복하게 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고통과 행복을 못 느끼는 것은 아니다.오히려 우둔한 범부보다사실은 더 잘 깨달아 아느니라.다만 즐거움을 만나도 함부로 하지 않고괴로움에 부딪쳐도 근심을 더하지 않으며괴로움과 즐거움을 함께 모두 버려따르지 않고 어기지도 않을 뿐이다.나와 상대에게 같은 고통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상대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 수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 주어진 고통은 수많은 말로서도 다할 수가 없어 남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쓰고야 맙니다.살아 있는 모든 생명은 고통 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인정받지 못하면 열등감에 빠지게 됩니다. 열등감은 선정과 집중을 깨뜨려서 번뇌를 불러일으키고 그 혼돈이 지속되면 결국 우울감에 빠지게 됩니다.이런 연결고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수행이고 공부입니다. 그래서 일단 자신의 마음을 철저히 알아차려 자신의 우울감이나 화, 부정적 생각은 어디서 왔는지를 궁구하여야 합니다.그러면서 세상이 고통속에 시달리는 그 고통의 원인이 무엇이고 그것에서 벗어나 행복의 세계로 가는 길은 무엇인지에 대해 불법을 통해 배워 익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성제를 관하는 수행입니다.고성제 : 고통에 관한 고귀한
하늘이 맑아 기분이 좋습니다. 바람은 선선해 유쾌하고, 바쁘게 출근길을 서두르는 사람들의 발걸음에서 생동감이 느껴집니다. 문득 세상이 평화롭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가을 아침은 언제나 세상을 평화롭게 내보입니다. 설령 세상의 구석구석이 싸움판일지라도 가을 아침만은 그런 모든 것들을 지우고 평화로운 세상을 내보입니다. 가을이 내보인 세상같이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보라는 가을 아침의 부드러운 가르침이지요.오늘 아침 나는 욕심 하나를 버렸습니다. 오늘 아침 나는 미움 하나도 버렸지요. 그랬더니 마음이 편안해지고 행복해지는 겁니다. 행복은
다시 아침이다. 그러나 어제의 아침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어제의 아침을 기억한다. 그래서 아침은 다시 아침이 된다.나 또한 다시 나다. 어제의 나를 기억한다. 어제 뿐만 아니라 나는 개인의 전 역사를 기억한다. 개인의 역사를 전 생애를 통해 나는 공유한다. 그래서 나는 다시 나다.아픔이 지나갔음에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와 그 역사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아픔은 우리의 가슴을 오래도록 강물처럼 관통한다. 우리는 기억을 끌고 사는 존재다. 기억이 실체가 없듯이 기억을 끌고 가는 나 또한 실체가 없다.
신심이 있어야만 법에 의지하고 지혜를 갖춰야만 바르게 이해합니다. 신심은 삼보를 믿는 마음입니다.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를 믿고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맹목적인 믿음은 사견을 불러일으켜 나와 남을 가르고 분별하여 알게 모르게 악업을 짓습니다. 행복을 위해 선택한 믿음이 결국 자신을 고통의 길로 휘말리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하지만 이해를 바탕으로 한 믿음은 그 믿음이 굳건해질수록 지혜가 커져가고, 지혜가 커질수록 믿음은 더욱 견고해지는 법입니다 올바른 믿음과 지혜는 서로 상승작용을 주며 서로 떨어지면 사견에 빠지게 되는 관계입니다
“어떤 이론이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다고 해서 무조건 따르지 말고어떤 가르침이 남들의 비난을 받는다고 해서 무조건 배척하지 말며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이 주장했다고 해서 검증되지 않은 말에 현혹되지 말라.” 세월이 빠르게 지나간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어느덧 저도 먹물빛이 자연스러운 세납과 법랍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 사회는 노인 인구가 20%를 넘어 초고령 사회로 진입했습니다. 통계청에서는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한국 사회의 장·노년 시대가 성큼 다가왔다."고 발표했습니다.그런데 대부분 노인 연령대가 스스로
삶에는 네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첫 번째 삶은 관람자의 삶입니다. 우리는 흔히 영화를 보는 사람을 '관람자'라고 표현합니다. 주어진 환경 내에서 열심히 사는 겁니다. 관람자는 아무리 노력해도 영화 내용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영화에서 드러나는 대로 울고 웃고 그냥 받아들이지요.두 번째 삶은 연기자의 삶입니다. 연기자는 본인이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자신의 몫, 자신의 배역만큼은 바꿀 수가 있지요. 이게 보통 사람들이 성실히 일해서 내 삶을 행복으로 만들어 가는 겁니다. 그런데 이미 주어진 조건들은 '내가 바꿀
설악산 봉정암은 매력이 있는 곳이다. 보궁을 오르는 길은 산과 자연 그리고 인간이 끝까지 서로의 의지를 시험하는 추억이 많은 기도처이다. 앞을 가로막는 바위절벽과 그 끝에 뿌리 내려 절개를 자랑삼아 버티고 선 소나무, 그리고 하얗게 부서지는 폭포와 선녀가 목욕이라도 할 것 같은 계곡은 손오공이 구름을 타고 금방이라도 나타날 듯한 풍경이다.그런 설악산 봉정암으로 매년 가을이 시작될 무렵이면 기도를 다녔다. 더운 여름도 완연한 가을도 아닌 어정쩡한 시기이지만 조금 빠르면 더위에 힘들고, 늦어져 가을이 익어지면 사람으로 단풍이 들어 복잡
하늘 맑다. 이런 날은 시도 읽지 말고 햇살이나 툭툭 차고 눌라는 김용택의 시가 다정하게 다가온다.햇살 툭툭 차다가 해살 가장 아름다운 곳이 어딜까 생각해 보았다. 설악이었다. 햇살이 수줍은 처녀의 볼처럼 살짝 익은 설악이라면 가장 아름다운 햇살을 만날 것만 같았다.설악을 가본지도 오래 됐다. 무엇이 바쁜건지 아님 게을러진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알랭드보퉁은 "여행의 기술"에서 때로 여행을 떠나지 않는 것이 여행을 떠나는 것보다 더 좋을 때가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냥 사진이나 그림으로 여행지를 감상하는 것이다. 그러면 여행지
나와 남을 바꾸는 연습을 하면 집착이 사라지고 사랑과 연민심은 커집니다. 그리하여 흔들리지 않고 평온한 마음을 유지할수 있게 됩니다. 세상을 더 많이 넓게 볼 수 있게 됩니다.나와남을 바꾼다는것은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하는것으로 역지사지와 비슷합니다. 어떤 사람을 보든 나무나 바위, 동물이든 상대가 곧 나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삶의 경험 속에 성숙이 이뤄지는데 만약 나와 남을 바꾸는 수행을 하면 수천 수만 존재들의 삶을 살게되니 지혜는 넓고 광대해집니다.성직자로서싀 삶.. 거지로서의 삶, 정치가, 범죄자,